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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 전연옥

올겨울에는 코피 터지게 연애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나의 소박한 희망을 듣고 직장 선배 한 분이 "그럼 권투 선수와 연애하면 되겠네" 하신다.
나는 가끔, 가장 쉽고 가장 단순한 방법들을 놓치고 사는 것 같아 공연히 서글퍼진다.
그래 올겨울은 권투 선수다. (1990년 2월)

똑같은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시인이 시를 안 쓰고 어떻게 살아?"

그러게 말이다.
시도 안 쓰는데 나는 왜 무탈하게 사는 걸까?

아무래도 불치병이다. (2021년 6월)

불란서 영화처럼/전연옥/문학동네 20210731 88쪽 10,000원

불란서 영화처럼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다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 없이 빈 갈비뼈가 안쓰러움은
결코,
이 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1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방법들은
어찌하여 이 모양 이 꼴로 매양 피곤한 것뿐일까
고통의 다리를 뻗고 누워 안식의 깊은 잠을 청할
미래의 내 묫자리가 사나워서 그런 것일까2

외로울 때는
가까운 사람의 잔소리도 위로가 될 텐데3

어차피, 미래는 끊임없이 이월되어
다시 태어나도
내 배후에는 길고 긴 겨울의 대열뿐인 것을4

사랑이란 원래
감춰두기 어려운 물건이잖아요5

밥 먹기 위해 시를 쓰는 일보다
어쩌다 끼니를 잇게 해주는 한 편의 시가
나에게는 고행처럼 즐거운 일임을6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멸치」가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이 민음사에서 낸 첫 시집을 문학동네에서 복간했습니다.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됐습니다. "다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슬픔과 고통을 통해 은근한 사랑을 얘기합니다.


  1. 멸치
  2. 불란서 영화처럼
  3. 로멘스 그레이
  4. 거미
  5. 에디트 피아프
  6. 시인, 그리고 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