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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 시골 수의사가 마주한 숨들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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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는 눈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심한 각막 건조증이 있는 작은 강아지였습니다. 화가였던 꽃비 엄마는 늘 꽃비를 데리고 다니며 안약을 넣어줬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꽃비 엄마가 쓰러지자 가족들은 꽃비를 잠시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꽃비 엄마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꽃비를 데리고 문상을 갔습니다. 문상객들은 꽃비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며칠 후 꽃비 엄마의 지인이 꽃비를 입양했습니다. 꽃비는 엄마와 작별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났습니다. "꽃비 엄마는 사랑하던 강아지를 가장 아껴줄 사람이 자기 친구라는 걸 알고, 그에게 꽃비"를 보냈습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예쁜 강아지, 비처럼 내리는 꽃비를 듬뿍 뿌려준 것 (20) "입니다. 족제비에게 물려가다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구구는 스님이 키우던 닭이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감염이 심각했습니다. 다리를 절단하려고 했지만 조언을 구했던 수의사들은 절단 수술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하면 나머지 다리에 심각한 체중 부하가 생겨 결국 반대쪽 발바닥 질병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체중이 늘어나도록 가축화된 닭에게 다리 절단 수술은 도움이 되지 (25) " 않았습니다. 구구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더 힘들어하기 전에 보내주었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구구를 만난 이후 닭은 보통 명사가 아니게 됐습니다. 아무도 입양 안 하는 장애묘를 데려다 가족으로 키우는 J, 대도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우울증에 빠진 포메리안 똘이, 사람은 이 세계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걸 일깨워 준 후투티 티티, 펫숍으로 반품된 장모 치와와 보리, 고속버스 택배로 왔다가 다시 택배 상자에 담겨 반품된 새끼 고양이, "세상 밖으로 나와 처음 만났을 공기와 너의 터지지 못한 첫 숨 (147) ", 인간이 평생 유전병...

망원동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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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2동 ◯◯◯-◯◯번지에 있는 못하는 게 없는 만능에, 간첩도 때려잡을 기세의 슈퍼할아버지의 8평짜리 옥탑방. 돈을 벌려고 재능을 쓰고, 그 돈으로 시간을 사서 재능을 키우며 만화를 그리는 오작가가 5백에 30을 내고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이민간다며 전자레인지와 스탠드를 주고 떠났던 전직 만화 출판사 영업부 김부장, 황혼 이혼을 당할 처지인 만화 스토리 작가 싸부, 아는 척, 잘생긴 척, 돈 많은 척하는 삼척동자가 어쩌다 돼지같이 모여살며 동고동락하는 망원동 브라더스가 됐습니다. 슈퍼할아버지는 상대편일 땐 악몽이지만 내 편일 땐 수호천사입니다. 명절만 되면 아무도 슈퍼할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아 중학교 2학년 애들처럼 불안해지는 중2병을 앓고 있습니다. 차례차례 서로 아는 사이가 된 망원동 브라더스는 허기를 쉽게 느끼는 걸 보니 모두 가난합니다. 버스와 지하철이 끊어진 시간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는 옥탑방으로 돌아갈 차비 걱정을 합니다. 경조사라도 갈라치면 봉투에 넣을 돈 걱정이 앞섭니다. 자연스럽게 나이와 짬밥으로 서열을 정리한 망원동 브라더스는 을의 자세와 빈대 정책으로 하루하루를 삽니다. 어떤 만남은 특허받은 숙취 해소 음료보다 탁월한 효과를 냅니다. 오작가가 망원동 옥탑방을 벗어나려고 집을 구하다 조선꽃을 만나며 망원동 브라더스의 찌질하고 궁상맞은 일상에 변화가 옵니다. 옆집의 화재로 인해 좋은 쪽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 때의 벼락치기 같은 마감이 일에도 삶에도 필요합니다. 마감 때 올라오는 집중력은 결국 스스로를 완성합니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스스로 묶어야 하는 매듭 같은 마감을 했습니다. 망원동 어디쯤에 있을 해장마차에 오랜만에 망원동 브라더스가 모였습니다. 아구아구 콩나물 해장국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지나다 슬쩍 옆에 앉아 소주 한 잔 건네며 묻고 싶습니다. 싸부는 여전히 식혜를 드시나요. 웹툰은 잘 그리고 있나요. 지금은 무슨 마감이 기다리고 있나요. ...

사로잡는 얼굴들 -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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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은 뒷다리가 일부 마비된 채 태어났다. 바이올렛을 잘 돌볼 수 없었던 보호자는 그를 생추어리에 보냈다 스물네 살의 당나귀 뱁스는 생후 17년간, 워싱턴 동부의 한 목장에서 올가미 던지기 연습 대상으로 살았다. 당나귀는 가격이 비싸지 않았던 탓에, 목장 주인들은 종종 연습용 마네킹 대신 당나귀를 이용했다. 뱁스가 워싱턴 술탄에 있는 생추어리 파사도스에 세이프 헤븐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에는 올가미로 인한 상처가 가득했다. 학대받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뱁스는 자신을 돌봐준 사람을 신뢰했고, 발굽 치료를 참아냈다. 열세 살의 요크셔 품종의 돼지 테레사는 도축장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구조되었다. 테레사는 어린 시절 잘 양육되지 못한 바람에, 돼지의 기본적인 행동 방식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한 번도 풀밭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풀밭을 걷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흙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그냥 먹으려고 했다. 그랬던 테레사에게도 보금자리를 만들고, 진흙에서 뒹구는 돼지의 습성이 차차 생겨났다. 스물한 살의 홀스타인 품종 소 베시는 생후 4년 동안 낙농장에서 임신을 반복하며 우유 생산자로 살았다. 은퇴한 젖소 대부분은 도축되어 햄버거용 고기나 반려동물의 사료로 만들어진다. 베사는 도축장으로 이송되던 도중에 구조되었다. 스물일곱 살 이상으로 추정되는 교배종 마리클레어는 캐나다에 위치한 농장에서 구조되었다. 임신한 암말의 소변을 채취해 호르몬 대체 약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농장에서는 암컷 말을 소변 채취용 마구로 묶은 채 좁은 우리에 가두어 놓고 반복해서 임신시켰으며, 소변을 농축시키기 위해 말을 탈수 상태로 만들었다. 낙농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농장에서도 수컷 새끼는 경제적 가치가 낮다. 수컷 망아지는 도축되거나, 해외로 팔려나갈 말고기를 거래하는 경매장으로 간다. 쓰임이 다한 암컷 또한 똑같은 운명에 처한다. 작가는 2008년에 서른네 살의 에팔루사 품종 말 피티를 만났습니다. 피티에게 끌려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것이 계...

대치동 시스템 빠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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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이란 무엇인가. "대치동은 한국 교육과 입시의 메카이자 정답으로 통하며 사람들의 동경과 숭배의 대상 (47) "이 되었다. "대치동 학원가의 이야기들은 정설처럼 굳어져 학원 정보를 얻는 것이 양육의 방식 (47) "으로 대세를 굳혔다. "대치동은 초등학교 때 고등수학까지 진도를 뺀다 (57) "고 한다. 선행학습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유명 초등 수학과 영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 (56) "이 나타났다. 대치동 시스템은 남들보다 더 먼저 배우려는 욕망을 부추기며 7세 고시생을 만들었다. 대치동 전성시대를 넘어 바야흐로 대치동 선도시대다. 이런 시대에 대치동 시스템을 거역한 엄마가 있다. "선행학습은 시키지 않겠다 (57) "고 다짐했다. "학원에 가는 일은 공부가 아니 (66) "라며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학원보다 중요한 것은 잠 (70) "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과보호해야 할 곳은 이제 디지털 세상 (81) "이라며 스마트폰 없이 키웠다. 교내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추세라 선구적인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네 엄마는 "내가 받은 걸 그대로 물려주거나 아니면 받지 못한 걸 주려고 하는 식 (99) "이 아니라 양육의 목적을 세웠다. 스스로 공부하며 "입시가 아니라 공부를 목표"로 양육했다. "양육의 목적은 자립"이고 "교육의 목적은 시민 (102) "이라고 생각하며 18년을 길렀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 삶의 만족과 보람을 얻을 수 있기를…. 자유로운 개인이지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를…. 매일의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103) " 엄마표 양육을 끝냈다. 대치동을 거스르며 18년 동안 양육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예단할 순...

제사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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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조차 개구라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영란은 이름을 정서로 개명했지만 여전히 뻥쟁이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수현이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울고 있을 때 영란은 할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뻥치며 말했습니다. 그 분야에서 네가 최초이자 최고가 되라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수현은 제사 코디네이터가 되었습니다. 제사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 뿐이라며 의뢰받은 제사상에 탕국 대신 아아, 옥춘 대신 마카롱을 올리며 알려졌습니다. 영란의 1주기에 제사상을 차리던 수현은 벌떡 일어나 빵집을 찾아 달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중심에 있길 원했고 주목받고 싶었던 영란은 입만 열면 뻥을 쳤습니다. 영란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가족에게 했지만 뻥쟁이라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 얘기를 뻥튀기했던 영란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의 썰풀이 대상이 되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습니다. 1주기 제사상을 봐준 수현은 문을 나서며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영란이 밥상을 챙겨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죽은 뻥쟁이 영란에게 내년이 올지는 모르지만, 수현은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책은 소설일까요, 만화일까요? 소설가 박서련과 만화가 정영롱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제사 코디네이터 권수현과 뻥쟁이 친구 박영란의 시점에서 쓰고 그린 이야기입니다. 뻥쟁이 영란의 거짓말에 악의가 없고 참이 숨어 있음을 수현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현은 빵집을 찾아 달렸고, 영란은 자기가 죽은 날마다 수현이 밥상을 차려줄 것을 믿습니다. 영란은 자신이 죽었다고 수현이 울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해마다 뻥쟁이 제삿날에는 쥐포 굽는 냄새가 날 겁니다. 제사를 부탁해/박서련, 정영롱/문학동네 20230207 144쪽 10,000원

시인의 말 - 전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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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에는 코피 터지게 연애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나의 소박한 희망을 듣고 직장 선배 한 분이 "그럼 권투 선수와 연애하면 되겠네" 하신다. 나는 가끔, 가장 쉽고 가장 단순한 방법들을 놓치고 사는 것 같아 공연히 서글퍼진다. 그래 올겨울은 권투 선수다. (1990년 2월) 똑같은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시인이 시를 안 쓰고 어떻게 살아?" 그러게 말이다. 시도 안 쓰는데 나는 왜 무탈하게 사는 걸까? 아무래도 불치병이다. (2021년 6월) 불란서 영화처럼/전연옥/문학동네 20210731 88쪽 10,000원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다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 없이 빈 갈비뼈가 안쓰러움은 결코, 이 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1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방법들은 어찌하여 이 모양 이 꼴로 매양 피곤한 것뿐일까 고통의 다리를 뻗고 누워 안식의 깊은 잠을 청할 미래의 내 묫자리가 사나워서 그런 것일까 2 외로울 때는 가까운 사람의 잔소리도 위로가 될 텐데 3 어차피, 미래는 끊임없이 이월되어 다시 태어나도 내 배후에는 길고 긴 겨울의 대열뿐인 것을 4 사랑이란 원래 감춰두기 어려운 물건이잖아요 5 밥 먹기 위해 시를 쓰는 일보다 어쩌다 끼니를 잇게 해주는 한 편의 시가 나에게는 고행처럼 즐거운 일임을 6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멸치」가 ...

낀 세대 생존법 - 40대 여성 직장인의 솔직 담백한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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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밀레니얼 세대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누리던 온갖 권력(?)도 누리지 못하는 낀 세대이다. 내가 보아온 기성세대는 사무실 청소를 지시하고, 커피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력자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위치에 도달하니 이젠 밀레니얼 세대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내 쓰레기통을 비워달라고, 커피를 타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며 부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겪었던 '라떼' 시절과 현재 직장 모습의 간극으로 인해 나와 같은 낀 세대들은 조금 외로운 느낌이랄까. 위로도 아래로도 소속될 곳이 없기에 그냥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하다. 위로는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대로 낙인찍혀 그들의 권력 남용을 계속 받아주어야 하고(지금 와서 밀레니얼 세대인 척 거부하기도 어색하니까), 아래로는 밀레니얼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성심성의껏 경청해야 한다. (21) 조직 내 막내이기 때문에 모든 험난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 조직 내 연장자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만으로 '옛날 사람'이나 '꼰대'로 놀림받고 선 긋기를 당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늙어간다는 것은 한 해, 두 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 Being '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난 그대로인데 주변인들이 나를 늙은이로 '만드는 것 Making '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 그 충격은 꽤 크다. (30) 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섣부르고 어설픈 리딩 Leading 과 '선배감'(내가 만든 단어인데 선배라고 느끼는 감정, 을 말한다)은 "라떼는 말이야" 또는 "나만 따르라”로 해석될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렇다. (38) 당신의 브랜드는 당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43) 어찌 보면, 세대라는 것은...

언론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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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2021년 여름은 뜨거웠다. 정치권도, 관련 학계와 단체도, 그리고 언론도 공포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는 일부 혹은 다수 언론과 정치에 언제 뜨겁지 않은 계절이 있었겠느냐마는,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를 가능케 하는 조항이 담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두고는 사뭇 더 이례적으로 달아올랐다. 두고두고 자신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 개정 사안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 언론은, 그리고 그에 대해 '제각각의 이유로 동조했던 정치권 일각은, 언론자유 침해를 주된 반대 이유로 내걸었다. '언론재갈법'이라는 강력한 언사까지 등장했다. (4) '언론자유에 대한 위협을 경고하는 언론의 목소리'가 '실제로 보장되었던 언론자유의 크기와 범위'에 정비례하는 역설, 즉 언론자유가 작아질수록 언론자유 침해 주장은 줄어들고, 언론자유가 커질수록 도리어 언론자유 침해 주장이 늘어나는 역설에 해당한다. (25) 사실상 한국 언론의 다수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대행하고 기타의 민주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언론자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과 그에 연계된 이해관계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을 위해 언론자유라는 수단 혹은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익을 해쳐서라도 언론자유의 확대를 꾀하기보단 자유의 위축을 수용한 대가로 이해관계를 보장받는 길을 선택해왔다. (27) 언론자유에는 두 개의 층위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시민에게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이며, 이차적으로는 이를 대행하는 언론기관에 주어진 자유이다. 언론기관의 자유가 증진될수록 시민의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존재목적이다. 그런데 언론이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수록 오히려 시민의 자유가, 특히 약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향을 마주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1역설이다. 또 언론은 억압하는 권력에게는 자유를 헌납하고, 관용하는 주권자와 그 대행자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남용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2역설이다. 나아가 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자연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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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것은 절단기, 멍키스패너,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크고 작은 나사, T자관, U자관 그리고 줄톱 들이었다. 쇠로 된 것들뿐이었다. 모두 난장이를 닮아 보였다. (61) 절단기, 멍키스패너, 플러그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크고 작은 나사, T자관, U자관, 줄톱 들이 난장이의 공구였다. 모두 쇠로 된 것들뿐이었다. (74)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 있는 부대를 둘러메었다. 영호가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에서 그 부대를 내려 옮겨 메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넘겨주면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영희를 보았다. (95) 말년의 그는 절단기, 멍키스패너, 플러그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T자관, U자관, 나사, 줄톱 들을 부대에 넣어 메고 다녔다. 난장이네 동네에서는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났다. (207)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268) 조세희/이성과힘 20250410(통쇄 331쇄) 416쪽 15,500원 자연사박물관 그는 아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해나 사랑 따위는, 추운 겨울밤, 먹지도 못할 닭똥집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철탑이나 고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의 선택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31) 헬스장에 간 적도 없고 등산도 하지 않고 오직 공장에만 다녔던 것인데, 공장의 노동은 근육을 만드는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른다면 근육을 빼앗긴 그의 몸은 저항할 틈도 없이 휘청, 나자빠질 것이다. (40) 국가도 법도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안다. 회사는...

신의 기록 - 로제타석 해독에 도전한 천재들의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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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로제타석이 발견된 이 해에 이집트는 무덥고 가난한 오지였다. 괜찮다. 서방을 매료시킨 것은 '고대' 이집트였다. 그리고 이곳은 결코 그 매력을 잃지 않았다. (11) 그 경외감은 성체자 聖體字, hieroglyphs 로 이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인상적인 쓰기 체계다. 로제타석의 비밀이 풀리기 이전의 그 오랜 시간동안 이 문자의 수수께끼는 모든 이집트 방문자의 면전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집트의 유적들과 무덤들은 매혹적이고 화가 치밀도록 정교한 그림문자로 뒤덮여 있었지만(한 초기 탐험자의 말을 빌리자면 "끝없는 성체자") 그 해독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15) 로제타석 . 맨 위가 성체자이고, 중간이 속체자(성체자의 일종의 간체자)이며, 아랫부분이 고대 그리스 문자다. 학자들은 그리스 문자를 읽을 수 있었지만, 다른 두 문자는 해독할 수 없었다. (25) 이 돌은 높이 1.1미터, 폭 0.8미터에 무게는 760킬로그램이었다. 위쪽이 울퉁불퉁해 이것이 본래 더 큰 것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27) 프랑스와 영국의 두 맞수 천재가 이 암호를 푸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둘 다 젊었고, 둘 다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모든 측면에서 상반됐다. 영국인 토머스 영은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축에 속하는 천재였다. 프랑스인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한 우물만 파는 천재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이집트뿐이었다. 영은 차분하고 우아하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었다. 샹폴리옹은 분노와 조바심이 넘쳐흘렀다. 영은 이집트의 '미신'과 '타락'을 비웃었다. 샹폴리옹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의 장려함에 탄성을 질렀다. (28) 더보기... 결정적인 점은 말하기는 자연발생적이지만 쓰기는 고안돼야 했다는 점이다. 말은 기어가기나 걷기처럼 우리의 생물학적 유산 가운데 하나다. 쓰기는 전화기나 비행기처럼 인간 창의력의 산물이다(그 엄청난 약진의 이야기는 사라져 ...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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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는 이 지구에 머물 재능이 있을까? 그 재능은 어쩌면 '집요하고 끈질기게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가, 성공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할 수 있는가'보다는 '지금까지의 내 방식을 버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젖어들 수 있는가'로 판가름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의 성패가 아니라 제대로 쉴 수 있는지 여부로 말이다. 가만히 두면 마음은 금방이라도 계획과 근심의 세계로 달아날 것처럼 날뛴다. 행복을 현재에 단단히 묶어 두기 위해선 제대로 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23) 멈춘다는 것은 주류를 이루는 가치에 '정말 그런가?' 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며, 엄숙함을 가장한 가짜 권위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멈춤은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도전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들은 세상이 그럭저럭 이 상태 그대로 돌아가길 바란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세력에겐 사람들이 멈춰 서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41) "사랑이란 슬픔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해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헤르만 헤세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집념이 강하다고 말해준 엄마가 생각난다. 의연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있기에 의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못난 점도 가볍게 받아들여 끌어안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있다. (72) 혼자 자겠다고 하던 그밤처럼 살아. 그때 자네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았어. 사람들은 생각만큼 다른 사람 사정에 큰 관심 없어. 그런데 늘 남이 어떻게 볼까, 재다가 일생을 보내지. 그러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때가 와서야 후회하지. 좀 더 나답게 살아도 좋았을 걸 하고 말이야. (119) 나는 실수라는 명사에는 '배우다'라는 부...

깃털 달린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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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는 단어는 라틴어 'migratus'에서 유래했는데,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엄청난 지리적 변화를 내포하는 말이다. 새들의 세상에서는 무리 전체가 반영구적으로 계절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현상, 즉 철새의 여정을 일컬어 흔히 '이주한다'고 표현한다. 그 이동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멀리까지 가는지는 새의 종류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전 세계에는 약 1만여 종의 새가 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어느 정도 이주를 한다고 본다. 그러니 대략 계산해도 5000가지가 넘는 이주 형태가 있을 수 있으며, 그중에 어떤 새도 정확히 같은 경로로, 정확히 같은 시기에, 정확히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진 않는다는 점에서 이주 경로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해진다. (16) 극제비갈매기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왕복으로 약 4만 킬로미터, 중간에 헤매는 거리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7만 킬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다. 동시에 북아메리카 서부의 높은 산에서 서식하는 추위에 강한 회색잣까마귀(Nucifraga columbiana)는 한겨울에는 산꼭대기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단 수백 미터 아래로 이주해 산허리에서 평화롭게 겨울을 난다. (31) 이주를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달라지는 일조시간은 새의 뇌에서 호르몬이 변하도록 자극해 새들이 포만감을 덜 느끼고 더 많이 먹게 만든다. 이렇게 식욕이 늘어난 상태를 '과식증'이라 하며, 그 덕분에 철새는 살을 엄청나게 찌울 수 있다. 평소 12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흰뺨솔새(Setophaga striata)는 이주를 위해 몸무게를 두 배 가까이 늘리는데, 이렇게 과도하게 찌운 살은 캐나다와 남아메리카 사이 3200킬로미터 이상의 여정을 날아가는 데 꼭 필요한 연료로 사용된다. 새들은 비행할 때 시간당 몸무게의 1퍼센트를 소모할 수 있다. (48) 이주는 정말 놀라운 능력이다. 몸이 가장 작은 새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벌새류는 몸무게가 단 3그램, 몸길이는 ...

혼모노, 당신은 바나나 우유인가 바나나맛 우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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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기 1 가 앞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삼십년 차 박수무당인 문수는 심기가 불편하다. "편의점 가판대 앞에서 바나나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는 뭐가 다른지 한참 고민하는데, 옆에서 누가 하나 남은 바나나 우유를 쏙 채간다.(133)" 바나나 우유마저 빼앗기고 별수 없이 바나나맛 우유를 집어들었다. 문수가 모시던 장수할멈이 떠나자 신령들도 떠났다. 신애기는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문수는 "바나나맛이 나지만 바나나는 아닌 우유(135)"를 마신다. 장수할멈이 신애기로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문수는 삼십년을 모신 장수할멈이 떠났지만, 목단을 제단에 올렸다. 생전에 할멈은 지화(紙花)가 아닌 생화만 좋아했다. "혼모노라면 환장(137)"했다. 신통했던 장수할멈은 혼모노 2 였지만 "존나 흉내만 내는 놈(120, 154)"이었던 문수는 니세모노 3 박수무당이었다. 신빨이 다한 문수는 혼모노 목단을 넣은 화병을 집어 던졌다. "지금 나를 향해 조소하는 것이 할멈인지 저 애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145)" 모른 채 작두를 탔다. 소설 〈혼모노〉 속 박수무당 얘기다. 소설집 《혼모노》에는 순도 높은 사랑이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65)"로 변하는 〈길티 클럽: 호랑이 길들이기〉, "무인도에서 구명보트를 발견한 기분(90)"처럼 아주 좋은 하루(?)일지도 모르는 〈스무드〉,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기도 뱉지도 못한 채(240)" 머금고 있는 〈우호적 감정〉, 지지 4 라는 말을 끔찍이 싫어하는 연리목집 며느리가 하소연하는 〈잉태기〉, "은빛 비늘을 품은 대어일지, 다 녹슨 해양 쓰레기일지(332)" 모르는 〈메탈〉 이야기가 있다. 특히 인간을 중시하여 "채광과 통풍에 신경(169)" 쓰는 건축가가 인간을 위한 공간을 설계하는 〈구의 ...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 지금의 의료 서비스가 계속되리라 믿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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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58.3명의 환자를 진료합니다(2019년 기준). (...) 놀랍게도 같은 해에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의사들은 하루에 고작 환자 8.1명 정도를 진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7) 태움을 뚜렷하게 정의하긴 어렵습니다. 괴롭힘의 방식과 양태가 제각각이기도 하고, 외견상으로는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에게 '교육'을 하는 형태를 띠니 교육과 괴롭힘을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태움의 대략적인 유형은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데요, '불공정한 업무 분담, 꼬투리 잡기, 망신 주기, 뒷말, 없는 사람 취급' 등입니다. (...) 본인이 태움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약 61%에 달했습니다. (16) 종합병원의 병동 간호사 1명이 하루에 담당하는 환자의 수는 대략 10.1명입니다(2019년 기준). 이렇게만 보면 적은 숫자인지 많은 숫자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게 당연한데, 해외의 간호사 1인당 환자 수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많은 주에서 간호사 : 환자 비율을 법으로 정해 놓고 있는데요, 뉴욕주는 일반적인 내과 병동에서 간호사 1인당 환자 4명 정도, 캘리포니아주는 간호사 1인당 환자 5명 정도를 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수간호사와 같은 관리 인력은 제외하고 실제 근무를 서는 인력만으로 잡은 것이니, 한국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죠. (20) 각자의 1인분을 하는 것으로도 벅찬데, 업무 역량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신규간호사가 구멍을 만들면 그 업무를 다른 간호사 혹은 교육 책임자인 본인이 져야 하니까요. 그 상황을 견디는 사람은 병원에 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병원 밖으로 밀려나는 게 '태움'이라는 현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상당히 높은 업무 강도 및 교대근무제와 함께 젠더적 요소까지 더해지면, 결혼과 출산 이후...

시인의 말 - 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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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상처적 체질/류근/문학과지성사 20100408(20240126, 초판 20쇄) 162쪽 12,000원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1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2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3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삶은 방금 첫 꽃송이를 터뜨린 목련남무 같은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아도 음악이 되는 황금의 시냇물 같은 것이었다 4 하루 종일 장래희망이 퇴근이었던 나는 풀려난 강아지처럼 성실하게 아랫도리를 흔든다 5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6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시인에게 근황을 묻지 말자 시인이란 전과 다름없이 지내면서 대답할 필요도 없이 시를 쓰는 사람들이다 7 사람을 만나면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으려는 기대 때문이었다 8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는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9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10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놈들은 오징어 꽁치 고등어 멸치 들처럼 삽시간에 한 그물에 잡혀들게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한번 생각해보라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오징어 꽁치 고등어 멸치가 대오를 이탈해 제멋대로 쏘다니는 편이 그나마 그 무지막지한 그물에 일망타진되는 수모를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지 않겠나 11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12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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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세상 살다 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구의 부모로 살면서 그 핏줄의 의무에만 충실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거라면 다른 동물들도 다 하는데 사람의 삶이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수십억분의 1만큼은 좋아지길 바라고 수십억분의 1만큼만 힘을 보탠다면 사람으로서 살다 간 보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정도로 나는 인생의 의미를 정리했다. (49)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유전자 수나 인간이 만든 문명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문명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자존심을 갖고 남을 둘러보면서 사는 모습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며, 그런 지혜를 어떻게 얻었는지,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결코 유전자로는 밝혀낼 수 없는 비밀의 영역일 것이다. (59) 뇌물도 선물이라고 우기고 받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지만, 선물도 뇌물일 거라고 생각하고 안 받는 사람도 있다. 올바르지 않은 일인지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말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오고 가는 현금 속에 싹트는 인정'이라는 사고방식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63) 어떤 종교도 인류애보다 우선할 수 없다. 인류가 공동운명체며 모든 인간이 저마다의 천부적인 생명을 얻은 귀중한 존재임을 일깨우지 않는 종교는 종교라 할 수 없다. 빈 라덴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런 테러를 저질렀다 해도 그가 주모자라면 그의 신이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그를 용서할 리 없다. 또한 미국이 아무리 정의와 정당방위를 외친다 하더라도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면 미국인들이 믿는 신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131) 젊은 세대들이 '사랑밖엔 난 몰라' 하고 사는 것도 곤란하지만 '사랑 따윈 난 몰라' 하면서 사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젊은이들이여, 힘들지만 그래도 사랑은 할...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 - 피임할 권리와 여성 해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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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여성 운동은 노동 운동과 마찬가지로 18세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 운동은 인구 과잉, 무한 경쟁, 사회적 빈곤과 무질서를 낳은 산업혁명 때문에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전체적인 인권 신장 및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확장하는 프랑스 혁명의 부산물 정도로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9) 현대 사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발전한 분야는 성적 구속에 대항하는 여성의 저항이다. 세상을 재건하는 가장 중추적인 힘은 자유로운 모성이다. (17) 여성은 스스로 깨닫고 무지의 결과에 대해 알아야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첫 단계가 산아제한이다. 산아제한을 통해 여성은 자발적인 모성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 도달할 때 기본적인 성적 자유를 찾을 수 있고 자신과 인류의 노예화가 중단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내재된 본능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끊임없이 치유해 나갈 수 있다. 이를 통해 여성은 세상을 재편하게 될 것이다. (23) 피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여성은 모성이 되는 경험과 불행한 삶 중 어떤 선택도 강요받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 및 정신적 활동과 모성의 균형을 맞출 것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모성은 모든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성이 어머니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친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아니며, 남편, 친구, 문화 그리고 삶의 기쁨에 필요한 모든 다양한 경험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75) 산아제한이라는 문제는 페미니즘 정신이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여성은 번식 능력을 통해 자신을 노예화하는 한편, 세상 사람들마저 속박하게 되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은 여성이 겪는 육체적 고통이다. 지나친 다산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여성의 성생활이다. 인류의 미래는 여성에게 달려 있다. 인류가 번창할지 아니면 쇠퇴할지 여부는 여성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123)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자유는 여성의 자유다. 자유로운 인류는 노예나 다름없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수 없다. 속박당한 어머니...

검은 고양이, 냥집사들에게 제일 끔찍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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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언급했는지 기억에 없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소설로 《검은 고양이》를 꼽더군요. 에드거 앨런 포 소설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데요.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사랑한 화자(話者)인 나는 성정이 비슷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이 눈에 띄면 바로 구해 왔습니다. 아내와 나는 "새와 금붕어와 훌륭한 개, 토끼와 작은 원숭이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게 됐습니다. 그중 몸이 칠흑같이 까맣고 영리한 플루토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됐습니다. 플루토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고양이 이름입니다. 플루토와 몇 해를 잘 지내는 동안 나는 술 때문에 쉽게 화내는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취해서 주머니칼로 플루토를 잡아 한쪽 눈을 도려냈습니다. 플루토는 상처를 회복했지만 나를 혐오하며 피했습니다. 그런 플루토에게 짜증이 난 나는 아무 잘못 없는 고양이를 나뭇가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날 밤 불이 나 집이 홀라당 탔습니다. 유일하게 타지 않은 벽에는 목에 밧줄이 둘려진 커다란 고양이의 모습이 부조처럼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자 고양이를 잃었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집에서 플루토를 닮은 고양이를 데려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녀석은 플루토처럼 눈이 하나 없고 가슴에 커다란 하얀 반점이 있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는 혐오감과 증오심이 들었습니다. 몇 주가 흐르자 고양이에게 있던 반점이 교수대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나는 참았던 공포와 함께 증오심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불이 나고 형편이 어려워 낡은 건물에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하실로 내려가다 고양이 때문에 넘어질 뻔했습니다. 화가 난 나는 도끼를 쳐들어 고양이를 내리쳤습니다. 아내가 막았습니다. 더 화가 난 나는 아내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쳤습니다. 아내는 즉사했습니다. 나는 시체를 지하실 벽 속에 넣고 회반죽으로 발라버렸습니다. 회칠을 한 벽은 손을 댄 ...

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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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공은 오랜 기간 떠돌이로 살았습니다. 마산 바닥에서 월세살이하던 실업계 고3 시절, 공부도 싫고 등록금 낼 여유도 없어 취업하려고 했습니다. '대다수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할 요소들이 기간제 상품(17)'일 만큼 가난해서였습니다. 교복을 벗는 순간만 고대했지만, 고민 끝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고졸이란 딱지는 수갑이며 죄수복이자 족쇄나 다름없(18)'었기 때문입니다. 폴리텍대학에 진학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돈만 주면 지옥 맨 아래층의 재래식 화장실 청소(39)'라도 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졸업 후 산업 기능 요원으로 일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4월 16일 소집 해제했습니다. 페인트칠 막노동을 하다 한국지엠 하청업체, SNT중공업 하청업체, ISO 탱크 컨테이너 정비업체, 현대로템 하청업체, 또 다른 SNT중공업과 현대로템 하청업체, 볼보 하청업체에 이르기까지 지난 12년 동안 수많은 공장을 전전했습니다. 그중 절반을 용접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수중에 들어오는 급여는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청년공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는 힘들고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9)'이었습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을 해달라 절규하는 하청 직원들이 있는데 동일 노동조차 안 시켜주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청업체 용접공 자리는 경력을 깡그리 무시하고 임금은 최저 시급으로 후려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재벌의 횡포가 아메리카노 정도라면 눈앞에서 직접 체험하는 차별은 에스프레소 원액(111)'만큼 썼습니다. 원청이 곡소리가 나면 하청업체는 이미 사십구재를 지낸 뒤였습니다. 이십대 남성은 공정론, 한탕주의, 일베와 펨코, 안티 페미니즘이란 문자의 감옥 안에 갇혔다. 젊은 친구들 말 좀 들어보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결국 수도권 대학생들만 예시로 들 뿐. 지금껏 내 삶에서 함께해왔던 동료의 목소리는 바깥으로 가닿지 않았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던 이들이 되레 능력주의의 시선으로 청년들을 ...

삶을 위한 정치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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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사람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낡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9) 양당제는 두 개의 지배적인 정당이 좌우하는 정치시스템을 말한다. 양당제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더 우파 쪽이고 더 기득권에 가까운 쪽이 우위를 점하기 쉽다는 데 있다. (27) 신자유주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나라들은 양당제 국가들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미국, 영구,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이 그렇다. 이들 나라들의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낳는 소선거구제였다. (28) 다당제가 가져올 수 있는 효과 중의 하나는 정치 혐오나 정치 무관심이 줄어들고 투표율이 올라가는 것이다. 다양한 가치와 정책을 가진 정당들이 존재하므로 '찍을 데가 없어서 찍지 않는' 현상이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46) 대한민국과 같은 최악의 양당제 정치시스템에서는 정치에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 중에 극히 일부만 논의된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당장의 선거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만을 따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논의해야 할 중요한 주제는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된다. (62) 양당제하에서는 유권자들도 사표 심리 때문에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택하는 전략적 투표를 반복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면, 전반적으로 정치가 하향평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양당제 구조하에서는 자기 자리를 영리하게 잘 챙기는 정치인이 성공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의 행태와 유권자의 기대 사이에는 점점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63) 정치시스템이 양당제로 굳어지면서 점차 기득권 정당들이 정치를 독과점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관료기득권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행정관료, 사법관료들은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은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과두정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두정이란 몇몇 소수가 지배하는 체제를 말한다. (...) 대한민국 지배구조를 '기득권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