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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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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눈높이에서 나무줄기를 관찰하는 식으로 환자의 ‘엄지발가락’만 측정하고, 머리 위로 자라나 나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듬지는 조금도 쳐다보지 않은 채 숲 건강을 포괄적으로 추론했다. 수목 관리자가 나무를 완전히 베어낼 때 온전히 관찰할 기회가 유일하게 주어졌지만 이는 화장하고 남은 유골로 사람의 병력을 평가하는 셈이다. (12) 지구 건강이 숲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숲우듬지는 산소를 생산하고, 담수를 여과하고, 햇빛을 당분으로 전환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공기를 정화하며, 무엇보다 이곳에는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 도서관이 자리한다. 전기 배전망이나 정수장과 달리 지구 건강을 지키는 이 복잡한 삼림 기계를 유지하는 과정에는 막대한 세금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는다. 다만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인간의 파괴 행위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16) 유년 시절 자연에서 식물을 발견하고, 만지고, 냄새 맡고, 식별하는 등 오감을 발달시키며 만끽했던 즐거움은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대학원생이 되어 연구하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소수의 여성에게 조언하는 과정에 영감을 주었다. 어릴 적 나의 마음에 담겨 있던 그 모든 열정은 헝겊 조각을 이어 붙인 조각보처럼 한데 뒤엉켜 궁극적으로 나를 세계 최초의 나무탐험가로 성장시켰다. 자연을 탐험하면서 평온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현장 생물학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나무였다. 대부분 고독이었다. 대부분 야생화였고, 나뭇잎이었고, 자연의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는 호기심이었다. (44) 최근 기후변화가 시작되고 날이 갈수록 극단적인 날씨의 진폭이 커지면서, 자연환경에서 비롯하는 계절적 온도 신호는 대자연의 체계에 큰 혼란을 주며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하루 단위로 규칙적인 빛 주기를 형성한 태양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가을 활동을 멈추고 겨울을 대비하거나 겨울 활동을 멈추고 봄 활동을 시작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식물이...

팔레스타인 실험실 - 이스라엘은 어떻게 점령 기술을 세계 곳곳에 수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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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장비를 편하게 사용해보고 '전장에서 시험한' 무기라고 홍보하면서 세계 최고의 무기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방위군 브랜드를 활용한 덕에 이스라엘의 보안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 대열에 합류했다. 팔레스타인 실험실 Palestine Laboratory 은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홍보 포인트다. (21)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한 대학살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규모였다.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전체 190만 명의 인구 중 최소한 75만 명이 강제로 쫓겨나 신생 국가의 국경 밖에서 난민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나크바 Nakba ', 즉 재앙이라고 부른다. 7개월 동안 531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은 구타와 강간, 구금을 당했다. (47) 이스라엘의 무기가 국가의 경제적 생존을 떠받치는 중추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이스라엘 정부가 공개하지 않는 탓에 정확한 수치를 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오늘날 300여 개의 다국적 기업과 6,000개의 스타트업에서 수십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판매량이 폭증해서 2021년 방위 수출이 역대 최고인 113억 달러에 달했다. 2년 만에 55퍼센트가 증가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사이버 보안 기업들 또한 매출이 급증해서 2021년에 100건의 거래로 88억 달러를 손에 넣었다. 같은 해에 이스라엘의 사이버 기업들은 이 분야 세계 자금의 4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팔레스타인 실험실에는 예나 지금이나 단점이 거의 없다.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워싱턴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종종 미국이 공개적인 지원보다는 은밀한 지지를 선호한 지역에서 활동했다. 가령 이스라엘은 냉전 시기에 미국 의회가 미국 기관들의 공식적인 활동을 봉쇄한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의 경찰을 지원했다. (52) 더보기... 1990년대에 냉전이 끝났을 때, 이스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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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 나는 반려동물과 보호자의 관계를 부모자식 같은 혈연과 비슷하게 여기는 것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물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동물을 인격화하는 것이다. 이름을 가진 동물과 함께 살게 되자 인간이든 아니든 가족 공동체에 소속된 존재에게는 그 역할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동물의 역할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다.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는 점에서, 또 보호자와 평생 종속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사람이 반려동물에게 건네는 말은 자연스럽게 부모-아이의 언어가 된다. (27)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씽어가 비유했듯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유색인종 애호가라 부르지 않고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여성 애호가라 부르지 않는다면,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사람을 동물 애호가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50) 사람들은 이곳을 강아지 공장 puppy mill 이라 부른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번식장에서는 강아지를 생산한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은 기계지만 번식장에서 강아지를 찍어내는 것은 모성을 가진 엄마 개다. 생명을 다룬다고 해서 여기가 공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엄마아빠 개는 기계보다 나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65) 누군가는 동물 활동가면 번식장을 없애라고 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 하지만 번식장은 없어지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유기견을 입양하지도 않아. 앞으로도 사람들은 품종견을, 새끼 강아지를 갖고 싶어할 거야. 그러면 번식장의 동물복지를 보장하는 쪽으로 가야지 무조건 없애라고만 하면 개들이 받는 고통은 어쩔 건데? (92) 우리나라에서 강아지를 판매하는 일반적인 경로는 번식장경매장-판매처(애견숍, 동물병원)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1,000여개의 번식장이 있다. 동물보호단체는 훨씬 많은 3,000여곳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

추월의 시대 - 세대론과 색깔론에 가려진 한국 사회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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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선진국들과는 달리 자국의 엘리트 계층과 '평범한 시민인 나'의 역량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안다. 엘리트 정치가 지극히 무책임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38) 한국 사회에는 엘리트 정치가 아니라 오히려 포퓰리즘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제각기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에 골몰하여 투쟁하는 한국인의 특질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되려면 무책임한 엘리트 정치에서 벗어나 책임 있는 포퓰리즘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 있는 포퓰리즘'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물을 때 우리는 '피드백 사회'라는 현상을 검토하게 된다. (39) 중도파란 말을 정치 현장에 대입할 때는 ‘스윙보터’라고 쓰기도 한다. 그들이 특정한 정당의 지지층이 아니라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들이 유동하는 현상이 아니라 유동하면서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했을 때 ‘캐스팅보트’라고 쓰기도 한다. (...) 한국의 선거에서는 오랫동안 충청 지역이 그러한 ‘캐스팅보트’의 위치를 점해왔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단일화 협상을 진행 중이던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사이에서 호남 여론이 고심한 것처럼 상황에 따라 기존에는 텃밭처럼 보이던 영역도 종종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지역주의가 퇴조하면서 2030세대 청년층이 캐스팅보트로 여겨지게 됐다. 보통 60세 이상이 산업화 세대로 여겨진다면, 4050세대는 민주화 세대로 여겨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중도파, 스윙보터, 그리고 캐스팅보트 등 뭐라고 부르든 그 집단의 무게추가 청년세대로 이동하는 현상은 물론 우리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68) 우리가 지금 중도파라고 표현하는 시민 그룹은, 1980년대부터 경제성장과 민주화 양쪽 모두를 적당히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경제성장도 좋은 일이고 민주화도 좋은 일이다. 현존하는 2개의 정치 세력이 각각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중한다면, 시민들은 순차적으...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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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지옥으로 지칭하는 헬조선, 삶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 저축을 포기하고 현재의 소비를 즐기는 욜로족과 같은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현실은 기성세대가 약속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현실이 젊은 세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반증한다. 과거의 방정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새로운 성공 방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식과 코인에 투자하고 사업을 시작하며 유튜버나 SNS의 인플루언서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길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에는 정신과를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에서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은 여전히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26) 한국 사회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주장이 문자 그대로 적용되는 사회다. 이상하게도 모두가 같거나 비슷한 목표를 추구하니 말이다. 누구나 일명 '사'자 달린 직업(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등)이나 공무원, 대기업 직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30) 나는 꿈을 꾼다는 것이 개인의 희망과 바람 그리고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꿈은 추구하는 과정 자체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꿈'은 개인을 구속하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하는 수단이다. (31) 나는 결혼을 반대하지 않는다. 단지 '결혼을 위한 결혼'에 참여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56) 아무래도 회사는 직원들이 책상을 오래 지키고 있을수록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정확히 그 반대다. 일을 오래 할수록, 특히 무의미한 일을 오래 할수록 우리는 피곤해지고, 자연히 실수가 잦아지며 살이 찌고, 병들어 간다. 이른바 '번아웃 증후군'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사생활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일이 곧 삶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에 길들여진다. (70)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

불편한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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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라는 사내는 동물의 음성 같은 어눌한 말씨, 엉거주춤 움직이는 병든 곰 같이 엉성한 동작,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 같던 콧수염과 턱수염으로 덥수룩한 얼굴, 큰 덩치에 위압감을 주는 눈빛, 미모보다는 연기로 승부해야 하는 인상, 빙하가 녹아 갈 곳을 잃는 북극곰 같아 의성마늘 햄과 쑥 음료를 아무리 먹어도 사람이 될 거라 믿어지지 않는 미련 곰탱이 같은 곰 같기도 하고 곰 사냥에 나선 원시인 같은 서울역 노숙자 출신입니다. 노숙자 독고가 우연한 인연으로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 ALWAYS에서 밤 열시부터 아침 여덟시까지 알바를 했습니다. 편의점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입니다.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가 편의점입니다. 이름인지 성인지 모르는 독고라는 노숙자가 임신한 고양이가 불쑥 사람의 집에 들어와 새끼를 낳듯이 느닷없이 불편한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불편한 편의점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그런대로 손님이 드나들었습니다. 제이에스라고 불리는 진상 손님도 들렸습니다. 참깨라면과 참치김밥에 참이슬을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하루를 마감하는 참참참 패키지 손님에게 술 대신 옥수수수염차를 권하기도 했습니다. 폐기 상품이지만 아직 괜찮은 도시락 같은 이도 만납니다. 원 플러스 원만 사는 이웃도 왔습니다. 꼴보기 싫은 사람에게 삼각김밥과 손편지를 건네면 좋아질 거라고도 했습니다. 불편한 편의점에 가면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지구가 인간을 함구하게 하려고 뿌린 역병 시대이지만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나무옆의자 20210420 268쪽 14,000원

어린 개가 왔다, 루돌이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살았겠지만 모르는지도 몰랐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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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얼어나버렸다. 평범한 소설가였던 정이현 작가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 이외의 종과 한집에서 살기 힘든 사람 (20) "이었다. "개라는 종을 키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30) " "한 생명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등에 짊어지고 싶지 (188) " 않았다. "개를 만지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229) " 한 개의 일생이 왔다. 2022년 12월, 생후 3개월 차 어린 개가 왔다. 어떡하지. 깍두기를 연상시키는 바둑이 가 왔다. "바둑이는 수컷이었고, 험준한 명산 자락의 한 마을에서 모견과 남매들과 있다가 발견되었다 (27) "고 한다. 바둑이의 사연과 함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가, 한 '개'의 일생 (31) "이 도착했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이 집에 남아야 할 둘은 바둑이와 나였다. (41) " 인간과 교감한 적이 없는 바둑이와 개를 키워본 적이 없는 인간이 만났다. 정말, 키울 수 있을까? 보호소에서 '프림'이라고 불리던 바둑이는 '루돌이'가 됐다. 바둑이가 12월에 왔고, 성탄절이 가까워지며 루돌프가 떠올라서이다. 필요한 것들은 우선 책으로 배웠다. 사유하며 산책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작가는 루돌이 덕분에 비자발적 프로산책러 가 됐다. 시고르자브종이자 하이브리드인 루돌이가 무시당하지 말라고 이름을 하루에 몇십 번 부르게 됐다. 이것은 "고유하고 특별한 단 하나의 개를 향한 (128) " 힘이자 사랑이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러면 루돌이가 슬퍼하잖아. (148) " 이 말은 힘든 날에 작가를 위로하는 주문이 되었다. "그렇다. 누가 온다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31) " "저 강아지와 이대로 영원히 한집에서 사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는데 ...

법과 정치의 분화와 통합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적 문제가 사법에 의해 처리된다는 것을 말한다. 공공 정책, 메가정치, 정치시스템 등과 같이 이전에는 정치가 해결해 왔던 문제들이 사법에 의해서 처리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헌정주의를 실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민주주의 정치의 한계를 보완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법과 정치에 각각 부여되었던 고유한 기능들이 와해될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실제로 정치의 사법화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법의 기능이 와해시키고, 이에 따라 정치에도 과부하가 걸려 정치의 기능이 와해되며, 정치는 다시 법을 압박하고 법은 정치화되는 악순환으로 어이질 수 있다. 법과 정치가 재통합되면서 법과 정치의 이상적인 분화가 해체되는 것이다. (282) 법과 정치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자면, 정치가 법을 만들고 법은 다시 정치를 규제하는 식으로 서로 연계된다. 그런데 정치의 사법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입법보다는 ‘사법’(司法)이다. (...) 이상적인 사법절차라면 법은 예측가능하고, 사법절차를 통해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며, 유능하고 공정한 법관이라면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는 이러한 전제들에 조금씩 균열을 가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문제들이 사법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번번해졌고, 사법기관은 주어진 법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정치적 문제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284) 법과 정치의 분리를 통해 서로에게 의존하면서도 연결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법과 정치는 서로 ‘기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289) 정치의 사법화의 기본 메커니즘은 어떤 사안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이에 대한 합헌성 또는 위법성 판단이 사법적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일부가 사법부로 이전되며, 자연스럽게 사법부의 권한이 확대된도 하다. (291) 정치의 사법화가 쟁점화된 것은 이를 통해 법과 정치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

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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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이 뭐라든 간에 경제학 역시 정치, 소망, 억측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마드리드 강연은 "더 이상 큰 전쟁도, 엄청난 인구 증가도 없을 거라는 가정하에서, 케인스 나름의 예측에 의한 명확하고 당연한 결과였다. 이 강연은 그의 논문 「우리 손주들을 위한 경제학적 예측」에 정리돼 있다. 이 논문에서 케인스는 1930년까지의 추세에 근거해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며 그 시간조차 경제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필요를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앞으로 다가올 많은 시대에도 고대 인간의 본성은 우리 안에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며 모두 만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케인스는 말했다. (33) 과거의 노동에 대해 살펴보면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경향이 되풀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절약할 방법을 알아낼 때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시간을 사용할 새로운 방식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에 대해 '지식 사회'와 '지식 노동자'보다 노동시장의 변화를 잘 살명하는 개념은 없다. (55) 인류의 탄생 이래 노동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재량 시간이 더 확보될 때마다 자신을 계속 분주하게 만들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심지어 실질적인 일에서 점점 멀어지면서도 노동의 속도를 늦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주로 실내에 틀어박혀 앉아서 일하는, 더욱더 추상적이고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유형의 일을 하느라 결국 더 바빠졌다. (65) 전혀 힘들지는 않더라도 잔뜩 스트레스 주는 업무,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업무, 누가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업무를 포괄할 '텅 빈 노동'이라는 개념의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 의심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철학적 대화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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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겠지만 평평한 지구론이 다시 득세하고 있다. (25)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지구는 평평할 뿐 아니라 남극대륙은 실제로 대륙이 아니며, 지구 둘레를 따라 세워져 있는(물이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얼음벽이다. 이 모든 구조물은 투명한 돔으로 덮여 있으며, 인간이 바라보는 태양과 달과 수많은 행성 및 별들은(이들은 매우 가까이 있다) 그 외곽에서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32) 졸저 《과학적 태도》에서 나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증거에 부합하지 않는 가설을 기꺼이 변경하려는 수용적 태도라고 주장했다. (40) 내 가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이 주장하는 삼각형 지구론과 사다리꼴 지구론 혹은 도넛 모양지구론 가설이 더 유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반대를 위한 반대는 물론이고 근거 없는 의혹에 따른 갑론을박과 입장 번복은 신뢰를 더욱 훼손할 뿐이다. 이 또한 과학자들이 논증하는 방식이 아니다. (45) 평평한지구론의 사고방식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평평한 지구론은 동기부여된 논증(motivated reasoning)의 대표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편향적으로 선택하거나 혹은 오해하면서도, 신념에 반하는 증거는 극단적인 편견을 앞세워 거부한다. (47) 내가 행사장에 앉아 있으면서 내린 결론은 이랬다. 평평한 지구론은 이들이 실험적 증거를 기반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이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 정체성은 이들의 삶에 목적을 제공한다. 공동체에 가해지는 박해에 대항하여 즉각적으로 단합된 공동체를 형성한다. 또한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은 모두 부패했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인생에서 마주하는 고난과 상처의 상당 부분을 해명한다. (52) 과학자들은 증거를 중요시하고 새로운 증거를 기반으로 의견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과학이 증...

2026 중국 과학기술의 부상과 미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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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의 연구개발 지출은 이미 미국을 넘어섰고, GERD 1 에서도 조만간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논문 수와 영향력에서도 미국과의 격차를 더욱 벌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곧 중국이 글로벌 과학기술 생태계의 중심이 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글로벌 학술지 편집위원 중 중국인의 비율은 논문 점유율에 비해 현저히 낮으며, 연구부정행위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이 미국을 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기술 영역에서 미국이 누려 온 독보적 지위를 글로벌 과학기술 생태계에서 차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26) 한중 양국이 오랜 기간 추진해 온 과학기술 협력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중국의 빠른 발전을 애써 무시하면서, 시혜적이고 경쟁자적 관점에서 양국 협력을 소극적으로 운영해 왔고, 이로 인해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에 맞는 한중 과기 협력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6) 중국의 양적 질적 성장은 철강, 조선,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핵심 제조업의 산업 구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2000년대 초반, 기술의 일본, 품질과 규모의 한국, 가격의 중국이 각자의 우위를 내세우면서 세계 시장을 삼분하고 있었다. 이를 '한중일 삼국지'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힘이 빠지고, 중국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현재는 대부분의 산업에서 중국 7, 한국 2, 일본과 기타가 1로 세계 시장을 분할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44) 더보기... 중국 바이오파운드리 2 시장은 지난 5년간 연평균 20%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하며 글로벌 생태계에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중국의 바이오의약품 CDMO 위탁개발생산 시장 규모는 이미 1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 중 바이오파운드리 관련 사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99) 중국 정부는 희토류 자원의 개...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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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하다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로써 촛불시민을 비롯한 지지자들에게 허탈을 안겼을 뿐 아니라, 박근혜 탄핵 이후 쓰러졌던 국민의힘 세력을 완벽하게 부활시켜 정치 경험이 일천한 검찰총장 윤석열을 곧바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또한 사회경제정책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는 민주화 이후의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실적이 없는 정부다. '공정'은 문재인 정부를 상징하는 구호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등은 모두 다 정말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회의적이다. (...) 또한 국민들이 피 흘려 얻은 권력, 촛불시민이 위임해준 대통령의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확대와 불평등 극복이라는, 국가와 사회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사회경제적 사안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촛불 이후 다 죽어가던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준 일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5) 저출산으로 망하는 게 아니라, 망할 세상이라 저출산이다. (24) 정치적 민주화, 촛불시위 이후 문재인의 등장이 불러온 희망과 기대가 어쩌다 좌절과 환멸로 바뀐 것일까? 민주진보를 표방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왜 '좋은 사회'의 길을 열지 못했는가? 왜 우리가 이루었다는 민주화와 선진화는 나에게 일상의 민주화와 삶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가? 한국이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넘어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가? 바로 지금 한국인에게 던져진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35) 성장주의, 경제만능과 물질주의는 지금도 한국인의 일상과 정신을 지배한다. 우리가 이것을 한국인의 일반 가치나 태도에 따른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개발주의의 오랜 지속성, 분단, 반공 체제, 외환위기 이후 미국형 시장 질서 확대와 취약한 사회 안전망 등을 포함하는 정치경제적 현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 시골 수의사가 마주한 숨들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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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는 눈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심한 각막 건조증이 있는 작은 강아지였습니다. 화가였던 꽃비 엄마는 늘 꽃비를 데리고 다니며 안약을 넣어줬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꽃비 엄마가 쓰러지자 가족들은 꽃비를 잠시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꽃비 엄마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꽃비를 데리고 문상을 갔습니다. 문상객들은 꽃비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며칠 후 꽃비 엄마의 지인이 꽃비를 입양했습니다. 꽃비는 엄마와 작별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났습니다. "꽃비 엄마는 사랑하던 강아지를 가장 아껴줄 사람이 자기 친구라는 걸 알고, 그에게 꽃비"를 보냈습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예쁜 강아지, 비처럼 내리는 꽃비를 듬뿍 뿌려준 것 (20) "입니다. 족제비에게 물려가다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구구는 스님이 키우던 닭이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감염이 심각했습니다. 다리를 절단하려고 했지만 조언을 구했던 수의사들은 절단 수술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하면 나머지 다리에 심각한 체중 부하가 생겨 결국 반대쪽 발바닥 질병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체중이 늘어나도록 가축화된 닭에게 다리 절단 수술은 도움이 되지 (25) " 않았습니다. 구구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더 힘들어하기 전에 보내주었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구구를 만난 이후 닭은 보통 명사가 아니게 됐습니다. 아무도 입양 안 하는 장애묘를 데려다 가족으로 키우는 J, 대도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우울증에 빠진 포메리안 똘이, 사람은 이 세계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걸 일깨워 준 후투티 티티, 펫숍으로 반품된 장모 치와와 보리, 고속버스 택배로 왔다가 다시 택배 상자에 담겨 반품된 새끼 고양이, "세상 밖으로 나와 처음 만났을 공기와 너의 터지지 못한 첫 숨 (147) ", 인간이 평생 유전병...

망원동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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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2동 ◯◯◯-◯◯번지에 있는 못하는 게 없는 만능에, 간첩도 때려잡을 기세의 슈퍼할아버지의 8평짜리 옥탑방. 돈을 벌려고 재능을 쓰고, 그 돈으로 시간을 사서 재능을 키우며 만화를 그리는 오작가가 5백에 30을 내고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이민간다며 전자레인지와 스탠드를 주고 떠났던 전직 만화 출판사 영업부 김부장, 황혼 이혼을 당할 처지인 만화 스토리 작가 싸부, 아는 척, 잘생긴 척, 돈 많은 척하는 삼척동자가 어쩌다 돼지같이 모여살며 동고동락하는 망원동 브라더스가 됐습니다. 슈퍼할아버지는 상대편일 땐 악몽이지만 내 편일 땐 수호천사입니다. 명절만 되면 아무도 슈퍼할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아 중학교 2학년 애들처럼 불안해지는 중2병을 앓고 있습니다. 차례차례 서로 아는 사이가 된 망원동 브라더스는 허기를 쉽게 느끼는 걸 보니 모두 가난합니다. 버스와 지하철이 끊어진 시간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는 옥탑방으로 돌아갈 차비 걱정을 합니다. 경조사라도 갈라치면 봉투에 넣을 돈 걱정이 앞섭니다. 자연스럽게 나이와 짬밥으로 서열을 정리한 망원동 브라더스는 을의 자세와 빈대 정책으로 하루하루를 삽니다. 어떤 만남은 특허받은 숙취 해소 음료보다 탁월한 효과를 냅니다. 오작가가 망원동 옥탑방을 벗어나려고 집을 구하다 조선꽃을 만나며 망원동 브라더스의 찌질하고 궁상맞은 일상에 변화가 옵니다. 옆집의 화재로 인해 좋은 쪽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 때의 벼락치기 같은 마감이 일에도 삶에도 필요합니다. 마감 때 올라오는 집중력은 결국 스스로를 완성합니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스스로 묶어야 하는 매듭 같은 마감을 했습니다. 망원동 어디쯤에 있을 해장마차에 오랜만에 망원동 브라더스가 모였습니다. 아구아구 콩나물 해장국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지나다 슬쩍 옆에 앉아 소주 한 잔 건네며 묻고 싶습니다. 싸부는 여전히 식혜를 드시나요. 웹툰은 잘 그리고 있나요. 지금은 무슨 마감이 기다리고 있나요. ...

사로잡는 얼굴들 -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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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은 뒷다리가 일부 마비된 채 태어났다. 바이올렛을 잘 돌볼 수 없었던 보호자는 그를 생추어리에 보냈다 스물네 살의 당나귀 뱁스는 생후 17년간, 워싱턴 동부의 한 목장에서 올가미 던지기 연습 대상으로 살았다. 당나귀는 가격이 비싸지 않았던 탓에, 목장 주인들은 종종 연습용 마네킹 대신 당나귀를 이용했다. 뱁스가 워싱턴 술탄에 있는 생추어리 파사도스에 세이프 헤븐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에는 올가미로 인한 상처가 가득했다. 학대받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뱁스는 자신을 돌봐준 사람을 신뢰했고, 발굽 치료를 참아냈다. 열세 살의 요크셔 품종의 돼지 테레사는 도축장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구조되었다. 테레사는 어린 시절 잘 양육되지 못한 바람에, 돼지의 기본적인 행동 방식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한 번도 풀밭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풀밭을 걷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흙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그냥 먹으려고 했다. 그랬던 테레사에게도 보금자리를 만들고, 진흙에서 뒹구는 돼지의 습성이 차차 생겨났다. 스물한 살의 홀스타인 품종 소 베시는 생후 4년 동안 낙농장에서 임신을 반복하며 우유 생산자로 살았다. 은퇴한 젖소 대부분은 도축되어 햄버거용 고기나 반려동물의 사료로 만들어진다. 베사는 도축장으로 이송되던 도중에 구조되었다. 스물일곱 살 이상으로 추정되는 교배종 마리클레어는 캐나다에 위치한 농장에서 구조되었다. 임신한 암말의 소변을 채취해 호르몬 대체 약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농장에서는 암컷 말을 소변 채취용 마구로 묶은 채 좁은 우리에 가두어 놓고 반복해서 임신시켰으며, 소변을 농축시키기 위해 말을 탈수 상태로 만들었다. 낙농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농장에서도 수컷 새끼는 경제적 가치가 낮다. 수컷 망아지는 도축되거나, 해외로 팔려나갈 말고기를 거래하는 경매장으로 간다. 쓰임이 다한 암컷 또한 똑같은 운명에 처한다. 작가는 2008년에 서른네 살의 에팔루사 품종 말 피티를 만났습니다. 피티에게 끌려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것이 계...

대치동 시스템 빠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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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이란 무엇인가. "대치동은 한국 교육과 입시의 메카이자 정답으로 통하며 사람들의 동경과 숭배의 대상 (47) "이 되었다. "대치동 학원가의 이야기들은 정설처럼 굳어져 학원 정보를 얻는 것이 양육의 방식 (47) "으로 대세를 굳혔다. "대치동은 초등학교 때 고등수학까지 진도를 뺀다 (57) "고 한다. 선행학습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유명 초등 수학과 영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 (56) "이 나타났다. 대치동 시스템은 남들보다 더 먼저 배우려는 욕망을 부추기며 7세 고시생을 만들었다. 대치동 전성시대를 넘어 바야흐로 대치동 선도시대다. 이런 시대에 대치동 시스템을 거역한 엄마가 있다. "선행학습은 시키지 않겠다 (57) "고 다짐했다. "학원에 가는 일은 공부가 아니 (66) "라며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학원보다 중요한 것은 잠 (70) "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과보호해야 할 곳은 이제 디지털 세상 (81) "이라며 스마트폰 없이 키웠다. 교내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추세라 선구적인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네 엄마는 "내가 받은 걸 그대로 물려주거나 아니면 받지 못한 걸 주려고 하는 식 (99) "이 아니라 양육의 목적을 세웠다. 스스로 공부하며 "입시가 아니라 공부를 목표"로 양육했다. "양육의 목적은 자립"이고 "교육의 목적은 시민 (102) "이라고 생각하며 18년을 길렀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 삶의 만족과 보람을 얻을 수 있기를…. 자유로운 개인이지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를…. 매일의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103) " 엄마표 양육을 끝냈다. 대치동을 거스르며 18년 동안 양육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예단할 순...

제사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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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조차 개구라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영란은 이름을 정서로 개명했지만 여전히 뻥쟁이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수현이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울고 있을 때 영란은 할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뻥치며 말했습니다. 그 분야에서 네가 최초이자 최고가 되라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수현은 제사 코디네이터가 되었습니다. 제사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 뿐이라며 의뢰받은 제사상에 탕국 대신 아아, 옥춘 대신 마카롱을 올리며 알려졌습니다. 영란의 1주기에 제사상을 차리던 수현은 벌떡 일어나 빵집을 찾아 달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중심에 있길 원했고 주목받고 싶었던 영란은 입만 열면 뻥을 쳤습니다. 영란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가족에게 했지만 뻥쟁이라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 얘기를 뻥튀기했던 영란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의 썰풀이 대상이 되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습니다. 1주기 제사상을 봐준 수현은 문을 나서며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영란이 밥상을 챙겨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죽은 뻥쟁이 영란에게 내년이 올지는 모르지만, 수현은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책은 소설일까요, 만화일까요? 소설가 박서련과 만화가 정영롱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제사 코디네이터 권수현과 뻥쟁이 친구 박영란의 시점에서 쓰고 그린 이야기입니다. 뻥쟁이 영란의 거짓말에 악의가 없고 참이 숨어 있음을 수현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현은 빵집을 찾아 달렸고, 영란은 자기가 죽은 날마다 수현이 밥상을 차려줄 것을 믿습니다. 영란은 자신이 죽었다고 수현이 울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해마다 뻥쟁이 제삿날에는 쥐포 굽는 냄새가 날 겁니다. 제사를 부탁해/박서련, 정영롱/문학동네 20230207 144쪽 10,000원

시인의 말 - 전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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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에는 코피 터지게 연애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나의 소박한 희망을 듣고 직장 선배 한 분이 "그럼 권투 선수와 연애하면 되겠네" 하신다. 나는 가끔, 가장 쉽고 가장 단순한 방법들을 놓치고 사는 것 같아 공연히 서글퍼진다. 그래 올겨울은 권투 선수다. (1990년 2월) 똑같은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시인이 시를 안 쓰고 어떻게 살아?" 그러게 말이다. 시도 안 쓰는데 나는 왜 무탈하게 사는 걸까? 아무래도 불치병이다. (2021년 6월) 불란서 영화처럼/전연옥/문학동네 20210731 88쪽 10,000원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다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 없이 빈 갈비뼈가 안쓰러움은 결코, 이 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1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방법들은 어찌하여 이 모양 이 꼴로 매양 피곤한 것뿐일까 고통의 다리를 뻗고 누워 안식의 깊은 잠을 청할 미래의 내 묫자리가 사나워서 그런 것일까 2 외로울 때는 가까운 사람의 잔소리도 위로가 될 텐데 3 어차피, 미래는 끊임없이 이월되어 다시 태어나도 내 배후에는 길고 긴 겨울의 대열뿐인 것을 4 사랑이란 원래 감춰두기 어려운 물건이잖아요 5 밥 먹기 위해 시를 쓰는 일보다 어쩌다 끼니를 잇게 해주는 한 편의 시가 나에게는 고행처럼 즐거운 일임을 6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멸치」가 ...

낀 세대 생존법 - 40대 여성 직장인의 솔직 담백한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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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밀레니얼 세대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누리던 온갖 권력(?)도 누리지 못하는 낀 세대이다. 내가 보아온 기성세대는 사무실 청소를 지시하고, 커피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력자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위치에 도달하니 이젠 밀레니얼 세대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내 쓰레기통을 비워달라고, 커피를 타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며 부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겪었던 '라떼' 시절과 현재 직장 모습의 간극으로 인해 나와 같은 낀 세대들은 조금 외로운 느낌이랄까. 위로도 아래로도 소속될 곳이 없기에 그냥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하다. 위로는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대로 낙인찍혀 그들의 권력 남용을 계속 받아주어야 하고(지금 와서 밀레니얼 세대인 척 거부하기도 어색하니까), 아래로는 밀레니얼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성심성의껏 경청해야 한다. (21) 조직 내 막내이기 때문에 모든 험난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 조직 내 연장자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만으로 '옛날 사람'이나 '꼰대'로 놀림받고 선 긋기를 당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늙어간다는 것은 한 해, 두 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 Being '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난 그대로인데 주변인들이 나를 늙은이로 '만드는 것 Making '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 그 충격은 꽤 크다. (30) 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섣부르고 어설픈 리딩 Leading 과 '선배감'(내가 만든 단어인데 선배라고 느끼는 감정, 을 말한다)은 "라떼는 말이야" 또는 "나만 따르라”로 해석될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렇다. (38) 당신의 브랜드는 당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43) 어찌 보면, 세대라는 것은...

언론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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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2021년 여름은 뜨거웠다. 정치권도, 관련 학계와 단체도, 그리고 언론도 공포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는 일부 혹은 다수 언론과 정치에 언제 뜨겁지 않은 계절이 있었겠느냐마는,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를 가능케 하는 조항이 담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두고는 사뭇 더 이례적으로 달아올랐다. 두고두고 자신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 개정 사안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 언론은, 그리고 그에 대해 '제각각의 이유로 동조했던 정치권 일각은, 언론자유 침해를 주된 반대 이유로 내걸었다. '언론재갈법'이라는 강력한 언사까지 등장했다. (4) '언론자유에 대한 위협을 경고하는 언론의 목소리'가 '실제로 보장되었던 언론자유의 크기와 범위'에 정비례하는 역설, 즉 언론자유가 작아질수록 언론자유 침해 주장은 줄어들고, 언론자유가 커질수록 도리어 언론자유 침해 주장이 늘어나는 역설에 해당한다. (25) 사실상 한국 언론의 다수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대행하고 기타의 민주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언론자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과 그에 연계된 이해관계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을 위해 언론자유라는 수단 혹은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익을 해쳐서라도 언론자유의 확대를 꾀하기보단 자유의 위축을 수용한 대가로 이해관계를 보장받는 길을 선택해왔다. (27) 언론자유에는 두 개의 층위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시민에게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이며, 이차적으로는 이를 대행하는 언론기관에 주어진 자유이다. 언론기관의 자유가 증진될수록 시민의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존재목적이다. 그런데 언론이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수록 오히려 시민의 자유가, 특히 약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향을 마주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1역설이다. 또 언론은 억압하는 권력에게는 자유를 헌납하고, 관용하는 주권자와 그 대행자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남용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2역설이다. 나아가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