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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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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감히 '밥을 먹는 자'라고 답하고자 한다. 불로 밥을 해 먹으면서 인간은 진화를 거듭해 왔다. 먹어야만 살아남는 숙명이야 짐승이나 사람 모두 매한가지이지만, 인간은 생존과 존엄, 그 모두를 갖추어 먹어야 하는 식사의 존재다. 먹이가 아닌 밥을 먹기 때문에 인간의 삶으로 나아온 것이며, 밥을 통해 사랑과 질투를 느끼고 협력과 경쟁을 배우며, 사람의 꼴을 갖추며 살아왔다. 그러니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밥 먹을 자격은 갖추고 사는지를 묻는 매서운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 질문 앞에서 서성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먹는 밥에 과연 인간성이 깃들어 있는지를 곱씹어 보면 끝내 미궁 속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자연 모두가 상처 받은 밥상을 무람없이 받아 들고 입만 흥겹고 배만 두둑해진 것은 아닐까. (7) 식사를 갖추기 어려운 이들이 고립된 식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사회의 역량이다. (17) 인간이란 실체를 정의하자면 살아오면서 먹은 음식의 총체이다. 음식은 오로지 물리적 맛과 영양, 칼로리의 총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의 모든 음식에는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자연의 변천까지 망라되어 있고, 여기에 개인의 기억과 사연까지 깃들어 있다. 포도가 보통의 과일이 아니라 어느 한 여인과 그 가족들의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그 무엇이었던 것처럼. 하여 오늘 우리의 입으로 쓸려 들어가는 지상의 모든 음식들이 무겁고 복잡하며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4) 다시 인간의 식사를 생각한다.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신체와 영혼의 칼로리를 채우는 것. 그것이 엄연한 식사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은 5천원 안짝으로 오로지 열량을 좇느라 허기진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편의점에나 가라 하고, 청년이 되어서는 돈이 모자라 스스로 편의점을 찾아가야 한다. (27) 어쩌면 오늘도 학교급식 메뉴는 '사골 곰탕'이다. 누군가의 '고기와 뼈를 우려내는' 사...

시인의 말 -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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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순 시인 엄마, 이 시집은 읽지 마, 다 모래야.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김혜순/문학과지성사 20220418 274쪽 12,000원 잡초들은 다 자신이 잡초1이라고 생각한다. 잡초는 죽은 사람들의 육체가 제1차로 윤회된 생물이다. 왜냐하면 죽은 다음 잡초가 되기 제일 쉽기 때문이다. 1 엄마는 시인들보다 말을 잘한다. 우리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다 죽음과 삶 중간에 있는 거라고 한다. 이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고 한다. 2 엄마는 이제 테두리가 없고 내 그리움도 테두리가 없다 3 한국어 모래의 어원은 물애 물을 거절한다는 의미 모래는 평생 몸을 비비지만 한 덩어리가 되지는 못합니다 4 달에서도 보이는 오징어잡이 배의 밝은 빛을 바라보며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구를 돌지? 상담자 F와 내담자 H가 전율을 참고 있다. 5 언어는 항상 왜 뒤에 올까? 시는 왜 그림자를 찍어서 쓸까? 6 흑흑, 나는 시를 쓰는 짐승 흑흑, 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짐승이 있어 7 결국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두고 가버려서 (왜 신생아는 태어나서 새끼를 빼앗기고 온 어미 새처럼 울까?) 8 내가 모래(구멍)만 말하자, 제일 먼저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났다. 그들은 말했다. 모래(구멍) 얘긴 듣고 싶지 않아. 존경하지 않는 선생님은 이메일을 보냈다. 다시는 모래(구멍) 얘기하지 마. 모래(구멍)는 혼자야, 모두 혼자야. 웅얼거리던 나는 답장을 보냈다. 모래(구멍) 얘기하지 않고는, 미치고 말 거예요. 9 가끔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단어의 영지를. 사실 명사들의 영지가 넓은 것 같지만,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의 영지가 더 넓다. 그중에서도 부사들의 영지가 제일 넓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의 상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명사나 대명사에 달라붙지 않게 된 그들의 무...

희망의 책 - 희망의 사도가 전하는 끝나지 않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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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종종 오해를 부른다. 사람들은 희망이 단순히 수동적이고 부질없는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행동과 참여를 요하는 진짜 희망과는 정반대다. 지구의 절박한 상황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무력감과 절망 때문에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희망컨대(!) 이 책은 사람들의 행동이 제아무리 미약해 보일지라도 정말로 변화를 일으킬 힘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수천 명이 실천하는 윤리적 행동과 노력이 쌓이면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 지구를 지키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는다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11) 사람은 낙관주의자거나 낙관주의자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네요. 그건 인생에 대한 경향이나 철학이에요. 낙관주의자로서는 그냥 '다 잘 될 거야'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절대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비관주의자와는 정반대죠. 반면에 희망은 일이 잘 되게 만들 수 있다면 온갖 수고를 다 하려는 완강한 결단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희망은 우리 일생의 행로를 바꿀 수 있어요. 물론 누군가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훨씬 더 희망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겠죠. 물이 절반 담긴 유리잔을 볼 때 그들은 절반이나 비었다고 여기기보다는 절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54) 암울한 지구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제인이 품고 있는 희망은 희망의 네 가지 주요 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놀라운 지능, 자연의 회복 탄력성, 젊음의 힘, 굴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력이 그것이다. 제인이 이러한 지혜를 공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끌어내기 위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66) 내가 '지성적인(intelligent...

얼어붙은 속헹 - 이주여성 노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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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지정 병원에서 만나는 이주 노동자들 가운데 특히 손가락을 잘린 경우가 많다. 주로 3D 업종에서 일하다 보니 손가락을 잘리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와 같은 원시적인 사고가 잦다. 지난 1970~80년대 생산직에서 일한 내국인 노동자들이 흔히 당한 산재 사고를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다. (21) 지난 70~80년대에는 내국인 노동자들의 야간노동이 흔했다. 밤새워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 시절 많은 여성 노동자가 일한 사업장에 대한 자료를 보면 밤샘 노동을 밥 먹듯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밤샘 노동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많다. 철야 노동하는 자리가 내국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뀐 것이다. 외국인 가운데서도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온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대략 130만 명 정도다. 그들은 주로 이른바 3D 업종에서 일하는데 노동하는 때가 야간인 경우가 많다. 물론 밤샘 노동은 농장보다는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35) 농장주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조선 시대에 지주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 때 많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주 노동자를 노비로 보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주 노동자를 단지 말하는 동물처럼 여기기도 한다. 우리네 밥상에 인권이 얼마나 있는가? 우리가 매일 대하는 밥상은 인권이 있는 밥상인가? 이런 물음을 가져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53) 이 농장 노동자들은 한 주당 6일 반을 일한다. 한 달에 이틀 이내로 쉬며 하루 보통 11시간씩 일한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길다. 6시에 일과가 끝난다고 해도 저녁에 비닐하우스를 관리하는 일이 계속 있다. 비닐하우스 온도를 관리하는 일이라든가 지하수를 돌본다든가 전기 시설을 점검하는 작업 등이 수시로 있다. 이 농장 노동자들의 한 해 노동시간은 연 3천 시간이 넘는다. 살인적인 노동시간이다. 한국의 노동자 연평균 노동시간이 2,100시간 정도이고 서유럽 노동자 한 해 평균 노동시간이 1,300시간 정...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 숲속의 우드 와이드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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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인간의 뇌와 비슷한 점이 있다. 숲속에서는 늙은 나무와 젊은 나무가 화학적 신호를 내보내며 서로를 인지하고, 서로 소통하고, 서로에게 반응한다. 인간의 신경 전달 물질과 똑같은 화학 물질을 사용하고, 이온이 연쇄적으로 진균의 막(membrane)을 통과하며 만들어 내는 신호를 통해서 말이다. 나이든 나무는 어떤 묘목이 자신의 친족인지 아닌지 구별할 줄 안다. 오래된 나무들은 어린 나무들을 양육하고 인간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과 똑같이 어린 나무에 음식과 물을 준다. 이것만으로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면서 숲의 사회적 본성에 대해, 또 숲의 사회적 본성이 진화에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에 충분하다. 진균 네트워크는 나무들을 건강하게 하려고 짜여진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래된 나무들은 자식 나무들을 엄마처럼 보살피고 있다. 어머니 나무. 숲의 의사 소통, 보호, 감각의 중심에 있는 장엄한 허브(hub), 어머니 나무가 죽는 날이 오면 어머니 나무는 무엇이 득이 되고 해가 되는지,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끝없이 변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남을지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친족과 후손 나무에 나누어주며 대대로 이어질 지혜를 물려준다. 이것은 바로 모든 부모가 하는 일이다. (16) 균근균은 식물과 사활을 건 소통 관계를 구축한다. 이와 같은 동반자 관계에 진입하지 않고서는 진균도 식물도 생존할 수 없다. 내가 찾은 유별난 버섯 세 종류 모두는진균 중 균근균에속하는 자실체였는데, 이들은 토양에서 수집한 물과 양분을 동반자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 낸 당분과 교환한다. 양방향 교류, 공생. (107) 균근 공생이 약 4억5000만~7억 년 전 고대 식물들을 해양에서 육지로 이주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진균이있는 식물 군집에서는 진균의 도움으로 척박하고 식물이 살기 힘든 바위에서도 식물이 영양소를 충분히 얻을 수 있었기에 식물이 육지에 발을 붙이고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저자들은 협력이 진화에 반드시 필요...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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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습니다. 2023년 11월 1일 기준 한국의 총인구는 5177만 명이다. 성별로는 남자가 2590만 명, 여자는 2587만 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3만 명 더 많습니다. 그럼, 죽여야겠네. 어느 놈을 죽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부업으로 네일숍을 운영하는 자객은 죽어 마땅한 놈은 1초도 망설임 없이 죽입니다. 수영 강습을 시작한 주경은 벗은 몸만으로 만나는 게 훨씬 안전하게 느낍니다. 군청이 주최한 러브 캠프에 강제로 참가당한 공무원 일순은 여러모로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폐급 미역이라는 뜻으로 '폐미'라고 불리게 된 완도 미역 김씨는 "어 그건 존나 아니야!"라고 외칩니다. 개쩝니다. 미지는 오지로 파견 나온 최초의 여직원입니다. 세상의 모든 최초의 여성처럼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공에 눈을 맞았습니다. 만화가 유웅은 대부분의 폭력은 확신에서 비롯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 망설이며 고민합니다. 데이트 폭력, 불법 촬영, 저출생, 외모 코르셋, 성차별은 왜 여성을 향할까요? 여성을 인간이 아닌 몸, 신체, 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누군가요? 현실의 폭력 앞에서 여자들만 죽고 남자들은 무사한 세상입니다.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한 2030 여성이 또래 남성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서부지법 난동사태에서 체포한 현행범 중 2030세대 대부분이 남성으로 추정됩니다. 소설과 만화는 은유를 뚫고 나와 콕콕 찌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느 놈을 죽일까요?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민지형, 정재윤, 임소라, 미역의효능, 류시은, 들개이빨/라우더북스 20250618 280쪽 19,000원

가족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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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각본에 따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딸 또는 아들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성인이 되면서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등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가족각본은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 따르는 걸 평범한 삶이라고 여기고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때때로 버겁게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 가족각본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 살피지 못한다. 다만 간혹 혼란을 경유해 가족각본의 실체가 감지된다. 가령 '성소수자' 혹은 '퀴어' queer 라고 불리는 인물이 무대에 등장하는 거다. 이 낯선 인물의 등장이 가족각본에 당연하게 정해져 있는 역할을 '꼬이게' 만든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가족 언어와 행위의 대부분이 성별에 기반한다는 걸 깨닫는다. (9)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개탄의 구호를 처음 접한 것이 2007년 최초의 차별금지법이 발의될 즈음인데, 이 익숙하고 오래된 구호가 문득 흥미롭게 보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주장에 등장한 소재가 왜 하필 며느리였을까. 동성결혼이 인정되기까지 거센 반대를 겪는 일이야 한국도 여느 나라와 다를 것 없겠지만, 그렇다고 며느리와 사위가 이토록 핵심적인 반대 이유로 등장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11) 역사적으로 성차별적이며 억압적 가족제도를 표상하는 '며느리'가 '동성애 반대'의 이유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도 한국사회가 막혀 있는 지점을 정확히 드러낸다.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이 두 단어가 가족제도의 경직성이라는 하나의 문제로 연결된다. (39) 오히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질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이 구호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면, 먼저 며느리는 여자, 사위...

처단,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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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계엄을 막지 못했다. 노동조합원과 노조 상근자인 '그녀'와 '그녀의 아내'. 그녀의 공식적인 신분은 아내의 '간병인'이었다. 그녀의 아내가 수술받은 날 대통령은 2차 계엄을 선포했다. 이주노동자로 와서 귀화한 알(AL)은 집회에서 계엄군의 총에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특정 교통공사 소속의 특정 지하철역 역장이 '특정 장애인 단체'라 부르며 증오하는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계엄군은 총을 쏘았다. 특정 지하철역 역장과 특정 교통공사 직원들이 먼저 총에 맞았다. 법적으론 여성이지만 여자가 아닌 단단은 계엄군이 난사하고 학살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광장에서는 극우파 집회 선동가이자 자칭 종교지도자가 계엄에 찬성하는 집회를 열었다. "계엄을 논하는 집회와 시위는 정치활동이다. 정치활동은 포고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종교지도자들을 사칭하는 선동가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독재자의 관점에서는 위협이 될 뿐이었다.(89)" 그들을 향해 계엄군이 발포했다. 특정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1208호 보호자를 병원에 들이닥친 군인이 쏘았다. 노동에 지쳐 잠이 드는 바람에 투표하지 않았던 양 간호사는 계엄군에게 끌려갔다.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도 사람(56)"이 살고, "연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서나 달려왔다.(58)" 그러나 계엄군 앞에서는 무력했다. 모여 항의하는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체포해 차량에 실었다. 심지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총으로 쏘고 감방에 가뒀다. 감방에 있던 사람들은 차례차례 끌려 나갔다. 모두 죽였다. 그렇게 어디에도 기록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됐다. 계엄은 "배신이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또다시 저지른 거대하고 끔찍한 배신이었다.(106)" 저 대통령은 성범죄자이자 ...

지속 불가능한 불평등 - 사회정의와 환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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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은 이미 불의로 병든 사회에서 불평등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대개 바이러스에도 가장 많이 노출되었다. 힘들게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팬데믹 초기에 마스크나 변변한 보호 장비도 없이 선택 아닌 선택을 해야만 했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 일을 하러 나갈 것인가, 건강을 지키려다 일자리를 잃을 것인가. 대형 상점 계산원, 요양보호사, 더 넓게는 사회의 기본적 용역을 담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사회의 물자 기지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익명의 수백만 시민이 매일매일 일하는 그 모든 산업 현장에서. (9) 선거운동에 민간자금이 들어갈 때의 근본적 문제점은, 소득이 높은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댈 수 있기 때문에 상위층에게 호감을 얻는 후보가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인 1표'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차츰 흐려지고 '1달러에 1표' 식이 되어버린다. 이 같은 상황은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을 영속시킬 수 있고, 그러한 불평등 자체가 정치 활동을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42) 공공자산의 감소와 민간자산의 폭증은 개인들 간의 불평등이라는 면에서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단 국가의 공공자산이 줄어들면 교육, 공공보건, 생태 전환에 투자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기가 어려워진다. 앞으로 세세하게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간자산 증가는 개인이 물려받는 세습자산의 불평등과 궤를 같이 한다. 자산은 소득보다 집중되기 쉬운데, 소득이 오르는 속도보다 부가 축적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96) 경제적 불평등은 여러 원인에서 비롯되고 그중 어느 한 원인을 따로 떼어내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게다가 불평등 심화 경향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지만, 국가별 특성이 다수 관찰된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포괄적인 설명을 경계해야 한다. 1980년대 초에 시작된 무역 및...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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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이 시작된 것은 이쯤이다. 98일간의 고공농성, 145일간의 본사 점거농성 그리고 매일 바리케이드와 방패를 앞세운 경찰에 의해 그들에게만 막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들의 싸움은 많은 주목을 받으며 알려졌으나 싸움의 순간들이 치열하게 이어지기에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모였다.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한, 저마다 지닌 세상 단하나뿐인 면모와 이에 연결된 삶과 노동의 이야기, 싸우며 다시 맺는 관계에 대해 그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었다. (7)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기, ‘불온한’ 사람들이 떼 지어 자신들의 ‘소유’도 아닌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교통 혼잡과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고 ‘감히’ 길거리의 자동차 경적보다 큰 소음을 내며 ‘말하고 있다’. “삶은 끝없는 ‘경쟁’이란 ‘절대 진리’를 어기며 타인의 기회를 뺏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13) 우리 집이 큰집이라 가족들이 다 우리 집으로 와요. 나는 못 간다고 전화했더니 난리가 난 거야. 이혼을 하니 어쩌니 막 이래. 그래서 내가 딱 잘라 이야기했어. 이혼하겠다. 그런데 나 바쁘다. 그러니까 바쁜 거 해놓고 하자. 이게 순서가 있잖아. 이혼이 급한 게 아니고, 투쟁이 급한 거거든. (37) 인터뷰 과정에서 톨게이트 수납 업무가 "아줌마들에게는 좋은 일자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이유는 3교대 시스템에서 근무를 바꾸어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과 월급이 밀리지 않고 제때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월급은 올라가지 않고 최저시급을 유지하고, 1년 단위 계약으로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 복지는커녕 근무복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환경인데 (거기다 성희롱에 갑질까지 횡행하는데) 좋은 일자리라고?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그리고 톨게이트 수납 업무가 '좋은 일자리'일 수 있는 것은 '아줌마들에게는'이라는 수식어 때문이라는 점에서 여성노동의 현실 또한...

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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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에 상호 등록된 출판사가 약 9만 8천여 개다. 그러니까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름이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 이름 짓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26)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 마름모의 슬로건은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가 되었다. (...) 나는 이렇게 뜬금없는 출판사 이름에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갖다 붙여놓은 마름모 출판사의 대표다. 평행하는 선들은 만나지 않지만, 마름모의 세계관 안에선 만나게 된다. 서로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던 대결 구도들이 마름모의 세계관 안에서는 합의점을 찾게 된다. 이것은 나의 고급 유머이자 도도한 아이러니의 발현이다! (28) 인맥이니 사람 관리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의식적으로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를 장착해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경험으로 배운 '처세술'이 하나 있다면, '진심'이다. 고마운 일에는 고맙다고 하고, 죄송한 일에는 죄송하다고 한다. 반면 죄송하지 않은 일에는 절대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하지 않는다. (47) 모종의 위계가 있는 인적 네트워크. 그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내가 혼자 일하는 작업실(우리 집)엔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인쇄소 부장님과 여러 작가님들과의 소통이 있지만 '정치'가 없다. 세상 평화로운 곳이 나의 작업실이다. 위계와 정치가 빠져나간 자리에,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에너지가 들어찼다. (102) 출판이 어려운 것은 무조건 '잘 팔리는' 책으로만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남을 수는 있을지라도 이름을 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두가지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싶다. 이건 나만의 포부가 아니라 많은 출판인들의 희망일 것이다. 우리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113) 펑펑 울었다는 그 작가님처럼 나도 오늘 울었다. 이젠 편집...

묻다 -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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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좋은 봄날 오후였다. 예술 평론 세미나에 갔다가 3년 전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조성되었던 매몰지가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땅이 되었다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딱히 내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그 말이 또렷하게 내 귀에 박혔다. (56) 우리나라에서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것은 2000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 기록이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최초 발생한 것이었지만 효과적인 백신 정책을 활용해 2,216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전염성 강한 구제역의 특성상 해외에서도 우수사례로 꼽힐 정도로 빠르고 완벽한 대응이었다. 2년 후인 2002년 전 국토를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기간 중에 다시 구제역이 발생했다. 두 번째였지만 당시만 해도 구제역은 축산업 종사자들에게조차 낯선 질병이었다. 당연히 국민적 이해도, 협조도 없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정부는 16만 155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으로 구제역 사태를 종결시켰다. 그 후 잠잠했던 구제역은 2010년에 다시 발생했는데, 그해에만 무려 세 차례나 발생했다. 1월에 발생한 6건의 구제역으로 28일간 5,956마리, 4월에 발생한 11건으로 29일 동안 4만 9,874마리, 11월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145일간 무려 347만 9,962마리가 살처분되었다. (82) '사료 소비', '생산량 감소', '수출 제한', '비용 절감'. 살처분 정책 어디에도 생명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인류가 아끼고 지킨 것은 오직 시간과 비용뿐이었다. 슬픔과 수치가 밀려들었다. (91) 결국 자비도 한계도 없는 대량학살로 145일 동안 국내 돼지의 34퍼센트인 331만 마리의 돼지와 국내 소의 5퍼센트인 15만 마리의 소를 포함해 총 347만 9,962마리의 동물들이 파묻혔다. (94)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2003년부터 2017년까지 14년 연속 자살률 1위다. 산업재해 사망률도 1위...

이름보다 오래된 -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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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수컷 노루 에게는 뿔이, 수컷 고라니 에게는 송곳니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만난 사슴에게는 뿔도 송곳니도 없었다. 아마도 암컷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암컷 노루와 고라니는 어떻게 구별하지? 겨우 찾아낸 힌트는 '노루궁뎅이 버섯'이었다. 하얗고 둥글고 보송보송한 모양이 노루 엉덩이를 닮았다고 했다. 황급히 달아나던 사슴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엉덩이에 그런 도드라지는 특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 노루가 아니라 암컷 고라니였을까? (54) '고라니'라는 이름은 순우리말이다. '노루'도 순우리말인데, '노랗다'는 뜻이다. 고라니의 어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뿔 대신 송곳니가 있어서 '어금니', '송곳니'라는 의미로 고라니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고라니의 영문 이름은 'Water Deer'다. '물사슴'이라는 뜻의 이 예쁜 이름은 어느 영국인이 1870년에 중국에서 고라니를 처음 발견했을 때 물가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고 붙인 것이다. (...) 한국에서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로 분류되어 있다. 농작물 피해 때문에 매년 지자체별로 적지 않은 수의 고라니를 제거하고 있다니.... 야생동물이라 보호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더 놀라운 것은 호주에만 사는 캥거루나 코알라처럼, 고라니는 오직 한반도와 중국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우리의 '고유종'이자 '희귀 동물'이라는 사실이었다. (...) 국제적으로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 IUCN 은 고라니를 멸종위기종 적색 목록 '취약'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많아서 천덕꾸러기 신세인 고라니가 사자, 하마, 치타, 코알라와 비슷한 수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종이라니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59)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

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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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단체 '빵과 장미 (Pan y Rosas)'는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을 선언하며 탄생했다. 이들은 여성 CEO의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피 말리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남성과 더 잘 '경쟁'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세계 최고 부자들 명단에 남성과 여성의 숫자가 동등해도 고용 불안과 저임금, 다양한 성차별적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삶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대통령 · 장관 · 기관장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도 다수 여성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이 체제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숱하게 경험했다. (6) 빵과장미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이른바 이중체계론과 연관된 특정한 조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게는 전략이 결여돼 있다"는 1914년 루이스 니랜드(Louise Kneeland)의 진술을 채택한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할 수 없다는 시각이 이들의 출발점이다. (8) 빵과장미는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볼리비아·브라질·칠레·멕시코·스페인 등에서도 활동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는 즉각적인 민주적 권리를 위해, 그리고 임신을 중지할 권리,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생활임금을 받을 권리, 폭행과 강간 및 학대를 피할 수 있는 권리 등 여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14) 빵과장미 이름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런스에서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의 '빵과 장미 파업'에서 따왔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내건 요구가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노...

제로노트 - 만화로 그린 치매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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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많은 일들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이한 일들을 허둥지둥 수습하며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급하게 밀고 들어오는 업무가 그렇고, 뜻밖의 사고가 그렇고, 만남과 헤어짐이 그렇고, 누군가의 부고가 그렇고, 내가 겪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다. (5) 수학적으로 의미가 없었다가 무한한 존재로 의미를 탈바꿈한 '제로'처럼 아버지 역시도 기억이 사라져 원점으로 돌아오는 모습이지만, 만화의 형태로 기록하여 간직하고 읽히는 동안 무한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8) 나와 다른 속도로 흘러가던 아버지의 시간은 당신의 생각이나 행동도 변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도 없이 아버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가는 것인지, 되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13) 치매가 진행된 이후, 평소에 지니고 있던 습관이나 버릇이 더 견고해져서 난감한 경우가 참 많다. (27) 수면 시간이 원래부터 길지 않았지만, 치매 이후로는 수면 패턴까지 불규칙해졌다. (63) 잘 해오던 행동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더러 있다. 특별히 조건이나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늘 하던 행동이 갑작스럽게 바뀌게 되면 이유를 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96) 참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117)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토록 선명한데, 아버지는 조금씩 자신을 지우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속에서 아버지는 아직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듯하다. (119) 치매 환자들의 고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계속 관찰해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고집과 망각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하다. 고집을 피우는 것인지, 정말 잊어버려서 그런 것인지 판단...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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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나는 나보다 50개월 어린 친구 어리를 딸로 입양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법적 가족이 됐다. 입양신고서를 접수하기 위해 방문한 읍사무소에서 가족관계등록 업무 담당자는 말했다. 해당 업무를 오래 했지만, 재혼가정도 아니고 게다가 나이 차이 얼마 안나는 성인 입양사례는 처음 본다고.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입양신고 일주년을 맞아 기념 여행을 다녀왔을 뿐 우리 삶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아침 함께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각자의 하루를 살며,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눈다. (5) 나이도, 성격도 모두 다른 우리가 만나 즐겁게 살았던 경험은 '이런 형태의 가족을 구성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게 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의지하면서 따뜻하게. 성별과 나이를 떠나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의지하고 살면 가족 아닐까? 가족이 꼭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땐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이렇게 조립과 분해가 쉬운 가족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0) 누군가는 귀농·귀촌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했다. 문화가 다른 낯선 곳으로 이민 가는 것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잘 정착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인 시골 생활은 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을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때론 어르신들의 과한 오지랖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133) 어르신들은 시골에 젊은이들이 없다며 시골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시골살이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늘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팍팍한 도시에서의 삶 대신, 물질적으로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다른 속도로 살아볼 수 있는 시골에서의 삶을 원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

나인, 외계인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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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듣고 있는 이상한 소리, 그거 식물이 대화하는 소리야. 그게 들리는 건 너도 식물이라서야. 어느 날 식물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인에게 들렸습니다. 나인은 지모와 함께 삽니다. 지모는 이름이 유지인데 유지 이모라고 부르다 '지 이모'로 줄였다가 '지모'로 부르게 됐습니다. 나인은 며칠 전부터 식물들의 소리가 들렸고, 손가락에서 새싹이 자랐습니다. 나인은 지모 손끝에서 자란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인이 됐습니다. 나인과 지모는 지구에서 몇백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외계인 누브족입니다. 지모는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이 외계인이라고 알려줍니다. 외부인이니까 인간들이 정해 둔 규칙을 지키며 정체를 들키지 않고 꽁꽁 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점이 지대가 있습니다. 점이 지대는 죗값을 무를 수 있는 유효 기간, 즉 죄책감이 유효한 마지막 기간 같은 겁니다. 죄책감의 유효 기간이 지나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신미래와 강현주는 유나인과 비밀이 없는 절친입니다. 나인은 이 년 전에 가출한 박원우 선배의 사연을 알게 됐습니다. 박원우가 죽어 묻혀 있는 땅에 뿌리내린 기억을 가진 식물이 나인에게 알려줬습니다. 세 친구는 점이 지대에 서 있는 범인을 잡아 경계를 넘어가는 걸 막으려고 합니다. 어느 북토크 자리에서 천선란 작가는 외계인이 있냐는 물음에 "외계인 혹은 인간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싹은 자라고 있는데 인간이 너무 빨리 태어나 8억 년 뒤에는 나타날지 모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미스테리하게 사라진 지모를 중심으로 나인2 집필 제의가 있었지만, 당장은 계획이 없다며 집필이 끝나고 출판하면 등장인물은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손서은 작가는 누군가 쓰러지면 무조건 119에 전화하라는...

가녀장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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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부장이었고, 여자 어른들은 집안일을 했고 남자 어른들은 바깥일을 했습니다. 엄마는 이름 없이 불리며 살림하는 자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슬아는 글을 썼고, 성공한 애로 불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는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이슬아는 스물두 살에 작가로 데뷔하며 마감의 힘으로 글을 쓰며 가녀장이 됐습니다. 오른팔에는 청소기를 왼팔에는 대걸레를 새긴 아버지 웅이와 살림노동으로 월급을 받는 어머니 복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슬아와 웅이와 복희가 바깥에서 밥을 사 먹는다면 가족 외식인지 직원 회식인지 모르지만, 모부는 슬아가 만든 출판사 직원이 됐고 슬아는 이 집안의 바깥양반이 됐습니다. 낮잠 자는 걸 좋아하고 출판이든 문학이든 낮잠을 자가면서 해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낮잠 출판사를 설립한 건 삼 년 전이었습니다. 슬아는 돈, 재미, 의미, 의무, 아름다움 중 최소한 두 가지를 충족하는 일만 수락합니다. 슬아는 노브라로 방송에 출연했다가 잘리기도 했습니다. 더우면 등목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콩나물국밥집에서 계산하며 중년의 여자 종업원에게 "선생님,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할아버지라는 가부장과 함께 살던 시절, 슬아에게 제사란 등짝과 엉덩이와 해진 양말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제사는 며느리의 노동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가녀장이 통치하는 집안에서 제사는 없습니다. 슬아는 말합니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슬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이것은 제가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라며 "작은 책 한 ...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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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지방 재생'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농산촌의 관계를 도시의 물자(돈, 사람)를 경제적 혜택을 그리 받지 못하는 농산촌에 전달한다는 식으로 연상하고 그 의미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농산촌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이 아닐뿐더러 그런 방식으로는 도시 기업과의 관계 역시 지속되기 어렵다. (48) 컨설팅 회사뿐만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이나 NPO, NGO 그리고 행정기관까지, 계획이나 전략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열심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만 할 뿐 정작 위험을 떠안는 것은 언제나 지역이었다. (52) 창업이란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밀려드는 고객들의 절실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지역은 동반 달리기를 원하고 있다"는 내 가설을 실증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지역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동반 달리기'를 해줄 파트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59) 나는 지금까지 NPO나 컨설턴트로서 지역 일을 해왔지만 어디까지나 흑자를 만들어 그 마을을 지탱하도록 돕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역할 설정은 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장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업 주체가 된다고 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자 굳건하던 마음속 '장벽'이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123)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라는 사업 전체 콘셉트는 내가 정했다. 다만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가(제공 가치), 그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고객에게 전달할 것인가(타깃) 하는 문제는 실제로 고객과 접하는 매니저나 직원과 함께 고민해갈 생각이었다. (134) 마을에 점점이 있는 빈집을 호텔로 만드는 데서 나아가 빈집 이외의 자원을 호텔 기능의 일부로 활용해 인구 700명의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을 ...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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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눈높이에서 나무줄기를 관찰하는 식으로 환자의 ‘엄지발가락’만 측정하고, 머리 위로 자라나 나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듬지는 조금도 쳐다보지 않은 채 숲 건강을 포괄적으로 추론했다. 수목 관리자가 나무를 완전히 베어낼 때 온전히 관찰할 기회가 유일하게 주어졌지만 이는 화장하고 남은 유골로 사람의 병력을 평가하는 셈이다. (12) 지구 건강이 숲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숲우듬지는 산소를 생산하고, 담수를 여과하고, 햇빛을 당분으로 전환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공기를 정화하며, 무엇보다 이곳에는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 도서관이 자리한다. 전기 배전망이나 정수장과 달리 지구 건강을 지키는 이 복잡한 삼림 기계를 유지하는 과정에는 막대한 세금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는다. 다만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인간의 파괴 행위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16) 유년 시절 자연에서 식물을 발견하고, 만지고, 냄새 맡고, 식별하는 등 오감을 발달시키며 만끽했던 즐거움은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대학원생이 되어 연구하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소수의 여성에게 조언하는 과정에 영감을 주었다. 어릴 적 나의 마음에 담겨 있던 그 모든 열정은 헝겊 조각을 이어 붙인 조각보처럼 한데 뒤엉켜 궁극적으로 나를 세계 최초의 나무탐험가로 성장시켰다. 자연을 탐험하면서 평온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현장 생물학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나무였다. 대부분 고독이었다. 대부분 야생화였고, 나뭇잎이었고, 자연의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는 호기심이었다. (44) 최근 기후변화가 시작되고 날이 갈수록 극단적인 날씨의 진폭이 커지면서, 자연환경에서 비롯하는 계절적 온도 신호는 대자연의 체계에 큰 혼란을 주며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하루 단위로 규칙적인 빛 주기를 형성한 태양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가을 활동을 멈추고 겨울을 대비하거나 겨울 활동을 멈추고 봄 활동을 시작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식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