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정치의 분화와 통합

  •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적 문제가 사법에 의해 처리된다는 것을 말한다. 공공 정책, 메가정치, 정치시스템 등과 같이 이전에는 정치가 해결해 왔던 문제들이 사법에 의해서 처리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헌정주의를 실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민주주의 정치의 한계를 보완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법과 정치에 각각 부여되었던 고유한 기능들이 와해될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실제로 정치의 사법화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법의 기능이 와해시키고, 이에 따라 정치에도 과부하가 걸려 정치의 기능이 와해되며, 정치는 다시 법을 압박하고 법은 정치화되는 악순환으로 어이질 수 있다. 법과 정치가 재통합되면서 법과 정치의 이상적인 분화가 해체되는 것이다. (282)
  • 법과 정치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자면, 정치가 법을 만들고 법은 다시 정치를 규제하는 식으로 서로 연계된다. 그런데 정치의 사법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입법보다는 ‘사법’(司法)이다. (...) 이상적인 사법절차라면 법은 예측가능하고, 사법절차를 통해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며, 유능하고 공정한 법관이라면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는 이러한 전제들에 조금씩 균열을 가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문제들이 사법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번번해졌고, 사법기관은 주어진 법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정치적 문제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284)
  • 법과 정치의 분리를 통해 서로에게 의존하면서도 연결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법과 정치는 서로 ‘기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289)
  • 정치의 사법화의 기본 메커니즘은 어떤 사안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이에 대한 합헌성 또는 위법성 판단이 사법적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일부가 사법부로 이전되며, 자연스럽게 사법부의 권한이 확대된도 하다. (291)
  • 정치의 사법화가 쟁점화된 것은 이를 통해 법과 정치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일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기관에서 처리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이는 민주주의 기본원리에 상충되며, 더 나아가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95)
  • 정치의 사법화가 일상화되면, 정치적 결정은 종국적으로 사법에 의해 최종 판단을 받아야 종결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다. 어차피 사법적 판단을 받아야만 해결되는 것이라면 굳이 정치과정에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치 고유의 방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사법적 결정을 의식하여 그 잣대에 맞추어 정치적 결정을 미리 조정하는 일이 빈번해질 수 있다. 정치과정에서 법적 담론이나 전문용어, 규칙・절차 등이 정치적 영역에서 확산되고, 사법적 판단을 예측할 수 있는 법률전문가의 힘이 자연스럽게 커진다. 사법에 의해 정치가 식민화되는 것이다. (301)
  • 정치가 사법을 직접 통제하려고 들지 않아도 사법 스스로 정치화되기도 한다. 정치의 사법화에 따라, 사법 전체의 조직적 이익을 위해서 또는 사법부 구성원들의 개별적 이익을 위해 정치적 분파의 이익에 복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법관 임명과 법원의 예산・조직에 관여하는 정치세력의 눈치를 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법 고유의 논리 대신 정치적 유불리가 사법을 지배하게 되고,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정치적 성향으로 이분화된다. 이른바 '법원의 정치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302)
  • 정치의 사법화가 확산된 이유는 정치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문제를 사법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정치가 제 기능을 한다면 정치의 사법화로 가는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 정치의 본래 기능 회복이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대안으로 언급되는 이유다. (304)
  • 정치의 사법화를 막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은 위헌법률심사기능의 폐지 등을 통해 정치의 사법화를 제도적으로 막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의 순기능도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정치의 사법화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사법이 스스로 자기제한의 미덕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305)
  •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가 문제를 사법에 가져간 것에서 촉발된 것이지, 사법이 정치적 문제를 사법에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결국 정치의 실패가 정치의 사법화를 불러온 것이고, 정치가 제 기능을 했다면 애초에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정치에서 찾아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시민적 요구를 배반하고 무능한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면 정치의 사법화는 불가피해질 것이다. 계속되는 정치의 실패를 방관할 수만은 없으며, 사법이 정치를 통제하고 교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힘을 얻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08)

홍성수, "법과 정치의 분화와 통합", 「법과 정책」, 29집 3호, 2023.12, 281-318쪽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양면을 살펴본 논문입니다. "사법심사가 정치의 실체적 내용에 지나치게 관여하면 안되겠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이 (특히 소수자들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대표성(representation)의 실패를 교정하고 민주주의가 더 잘 작동하도록 물꼬를 틔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거나, 정치적 결정이 주권자의 의사에 부합했는지 시민사회와 충분히 소통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적 검토에 집중한다면(307)" 사법이 정치화될 가능성이 줄어들 겁니다.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정치에 있지만,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판사에 따라 판결을 예측하는 것이 도박 수준이라면 당연히 그 결정에 불복하지요. 더군다나 지금은 법관의 양심만 믿을 수 없는 K-재판-이라고 쓰고 개판이라고 읽는- 세상입니다. 캄비세스의 심판이 절실합니다.

캄비세스 왕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린 시삼네스 판사의 살가죽을 벗겨 죽였습니다. 그 살가죽을 무두질하여 재판관 의자에 깔도록 명했습니다. 후임으로 시삼네스의 아들인 오타네스를 임명한 캄비세스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재판할 때, 네가 어떤 의자에 앉아 있는지 꿈에도 잊지 마라."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덧. 오탈자
291쪽 마지막 행 사법부의 권한이 확대된도 하다. → 사법부의 권한이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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