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 작년 봄, 나는 나보다 50개월 어린 친구 어리를 딸로 입양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법적 가족이 됐다. 입양신고서를 접수하기 위해 방문한 읍사무소에서 가족관계등록 업무 담당자는 말했다. 해당 업무를 오래 했지만, 재혼가정도 아니고 게다가 나이 차이 얼마 안나는 성인 입양사례는 처음 본다고.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입양신고 일주년을 맞아 기념 여행을 다녀왔을 뿐 우리 삶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아침 함께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각자의 하루를 살며,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눈다. (5)
  • 나이도, 성격도 모두 다른 우리가 만나 즐겁게 살았던 경험은 '이런 형태의 가족을 구성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게 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의지하면서 따뜻하게. 성별과 나이를 떠나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의지하고 살면 가족 아닐까? 가족이 꼭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땐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이렇게 조립과 분해가 쉬운 가족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0)
  • 누군가는 귀농·귀촌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했다. 문화가 다른 낯선 곳으로 이민 가는 것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잘 정착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인 시골 생활은 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을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때론 어르신들의 과한 오지랖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133)
  • 어르신들은 시골에 젊은이들이 없다며 시골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시골살이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늘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팍팍한 도시에서의 삶 대신, 물질적으로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다른 속도로 살아볼 수 있는 시골에서의 삶을 원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시골살이를 망설이는 큰 이유는 '살 곳'과 '일할 거리', '또래 친구'다. 막상 마음을 먹더라도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고, 주저하는 것도 사실이다. (138)
  • 누군가와 함께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비슷한 식성'과 함께 '비슷한 위생관념'을 꼽는다. 만약 위생 관념이 많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면 습관과 성격이 상호보완적이거나,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오래 같이 살기 어려울지 모른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과 성격을 고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나와 어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건 그 간극이 아주 크지 않아 서로에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159)
  • 적당히 다정하고 적당히 가까운 사이. 남녀노소를 떠나 서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사이.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이. 그러면서도 의리를 지키는 사이. 비단 모녀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이든 친구 사이든 모든 관계에는 '아름다운 거리'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 거리를 지키며 살고 싶다. 너는 너, 나는 나, 서로에게 피해주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잘 사는 것,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관계 같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는 평온한 사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다. (206)
  • 내 가족은 부모, 아들, 딸 4인으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표본이었다. 이 허울뿐인 정상가족은 수십 년을 버티다 결국 허물어졌다. 정상가족의 환상 따윈 나에게 없다. 결혼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함께 사는 구성원 간에 예의와 의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가족을 갖고 싶었다. (212)
  • 어리와 즐거운 일, 슬픈 일을 함께하며 산 지 5년이 지나며 앞으로도 우리가 반려인으로 잘 살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한 우리는 법으로 묶인 가족이 되기로 했다. 법적 가족이 되기로 한 건 무엇보다 위급상황에서 서로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돼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그리고 누구 한 사람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먼 곳에 살며 어쩌다 한 번씩 보는 형제나 친척이 아닌 함께 사는 서로가 마지막을 정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길 마냥 기다리다가는 이대로 할머니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법이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법을 이용하지, 뭐. 세상을 상대로 싸우기보단 기존 틀 안에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227)
  • 어리와 법적 가족이 됐다고 해서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입양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이미 반려인으로 같이 살며 서로의 울타리가 돼주는 가족이었으니까. 다만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하나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심리적인 안정감. 만약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 많이 사라졌다. 일단 어느 날 갑자기 한 명이 크게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됐을 때 바로 법적 보호자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안심된다. 그리고 둘이 살다가 나중에 누구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일상 생활을 함께했던 서로가 유가족의 자격으로 마무리해줄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놓인다. (237)
  • 성인 입양은 입양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다음 날 바로 가족이 될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구속력 있으면서 모든 행위에서 법적 권리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부모자식 사이가 되는 것이 이렇게 쉽다는 게. 입양은 이렇게 쉬운데 다양한 가족을 품어줄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 제정은 왜 그리 어렵기만 한 건지, 참으로 모를일이다. (242)

친구를 입양했습니다/은서란/위즈덤하우스 20230705 256쪽 16,000원

50개월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모녀지간이 됐습니다. 이상한 정상가족보다는 비정상가족에 가깝지만 조립식 분자가족에 비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습니다. 조립과 분해가 쉬운 느슨한 가족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프랑스에는 가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팍스라는 제도가 있지만, 우린 아직 없습니다.

성인 입양은 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되는데 생활동반자법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아직 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형태의 가족을 만들 권리는 우리에게 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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