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오래된 -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
-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수컷 노루에게는 뿔이, 수컷 고라니에게는 송곳니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만난 사슴에게는 뿔도 송곳니도 없었다. 아마도 암컷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암컷 노루와 고라니는 어떻게 구별하지? 겨우 찾아낸 힌트는 '노루궁뎅이 버섯'이었다. 하얗고 둥글고 보송보송한 모양이 노루 엉덩이를 닮았다고 했다. 황급히 달아나던 사슴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엉덩이에 그런 도드라지는 특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 노루가 아니라 암컷 고라니였을까? (54)
- '고라니'라는 이름은 순우리말이다. '노루'도 순우리말인데, '노랗다'는 뜻이다. 고라니의 어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뿔 대신 송곳니가 있어서 '어금니', '송곳니'라는 의미로 고라니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고라니의 영문 이름은 'Water Deer'다. '물사슴'이라는 뜻의 이 예쁜 이름은 어느 영국인이 1870년에 중국에서 고라니를 처음 발견했을 때 물가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고 붙인 것이다. (...) 한국에서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로 분류되어 있다. 농작물 피해 때문에 매년 지자체별로 적지 않은 수의 고라니를 제거하고 있다니.... 야생동물이라 보호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더 놀라운 것은 호주에만 사는 캥거루나 코알라처럼, 고라니는 오직 한반도와 중국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우리의 '고유종'이자 '희귀 동물'이라는 사실이었다. (...) 국제적으로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고라니를 멸종위기종 적색 목록 '취약'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많아서 천덕꾸러기 신세인 고라니가 사자, 하마, 치타, 코알라와 비슷한 수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종이라니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59)
-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 구제사업으로 3분마다 한 마리씩 총에 맞아 죽는다. 2014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3만 6,296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2018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1만 4,869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63)
-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특정 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천적 때문이 아니라 같은 종 내부의 경쟁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어떤 종이든 개체수가 무한대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 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나 서식지 같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같은 종의 개체들은 필요한 자원이 겹치기 때문에 직접 맞부딪혀 싸운다. 그래서 고라니 같은 초식동물에게도 송곳니가 있는 것이다. (69)
-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더 중요한 생명체라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생명체 간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것뿐이다. 그러나 자칭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주장이 인간 외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 모든 야생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산을 허물고 도시를 넓히고 도로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고라니의 생태는 존중되지 않는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도 오히려 불청객으로 내몰린다.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농작물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기를 바란다. 고라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나직한 물음이 가슴께에 밀려들었다. (70)
- 그 겨울을 건너는 동안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92)
-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안녕이었다. 부디 무사히 살아남기를,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이 초상 사진 작업은 존재 하나하나에 대한 나의 간절한 호명이자 정성 어린 기도였다. (106)
- 끝끝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래서 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고라니들조차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사슴이겠지만, 모든 존재에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107)
- 생태계에서 생명체들은 서로 얽히고 의지함으로써 모두를 지탱한다. 어떤 종을 멸종위기로 내모는 일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다. 모든 생명은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이미 존재하는 이상 누구도 구태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192)
이름보다 오래된/문선희/가망서사 20230728 196쪽 29,000원
10년간 200여 마리의 고라니를 만나 50여 점의 초상 사진을 완성했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지만 우리나라는 유해야생동물로 분류되어 3분마다 한 마리씩 총에 맞아 죽습니다. 2018년에 총에 맞아 죽은 고라니는 1만 4,869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웠지만 현상금으로 지급된 비용이 더 많았습니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도 오히려 불청객으로 내몰린다.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농작물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기를 바란다. 고라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고라니 몸짓은 인간보다 더 오래된 근원적인 몸짓입니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도 오히려 불청객으로 내몰린다.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농작물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기를 바란다. 고라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고라니 몸짓은 인간보다 더 오래된 근원적인 몸짓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