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기록이 시작된 것은 이쯤이다. 98일간의 고공농성, 145일간의 본사 점거농성 그리고 매일 바리케이드와 방패를 앞세운 경찰에 의해 그들에게만 막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들의 싸움은 많은 주목을 받으며 알려졌으나 싸움의 순간들이 치열하게 이어지기에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모였다.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한, 저마다 지닌 세상 단하나뿐인 면모와 이에 연결된 삶과 노동의 이야기, 싸우며 다시 맺는 관계에 대해 그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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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기, ‘불온한’ 사람들이 떼 지어 자신들의 ‘소유’도 아닌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교통 혼잡과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고 ‘감히’ 길거리의 자동차 경적보다 큰 소음을 내며 ‘말하고 있다’. “삶은 끝없는 ‘경쟁’이란 ‘절대 진리’를 어기며 타인의 기회를 뺏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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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큰집이라 가족들이 다 우리 집으로 와요. 나는 못 간다고 전화했더니 난리가 난 거야. 이혼을 하니 어쩌니 막 이래. 그래서 내가 딱 잘라 이야기했어. 이혼하겠다. 그런데 나 바쁘다. 그러니까 바쁜 거 해놓고 하자. 이게 순서가 있잖아. 이혼이 급한 게 아니고, 투쟁이 급한 거거든.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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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과정에서 톨게이트 수납 업무가 "아줌마들에게는 좋은 일자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이유는 3교대 시스템에서 근무를 바꾸어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과 월급이 밀리지 않고 제때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월급은 올라가지 않고 최저시급을 유지하고, 1년 단위 계약으로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 복지는커녕 근무복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환경인데 (거기다 성희롱에 갑질까지 횡행하는데) 좋은 일자리라고?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그리고 톨게이트 수납 업무가 '좋은 일자리'일 수 있는 것은 '아줌마들에게는'이라는 수식어 때문이라는 점에서 여성노동의 현실 또한 뒤돌아보게 된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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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발언할 때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인력 시장이라고. 알고 보면 이게 사람 장사잖아요. 아웃소싱 회사에서 오는 사람을 소개해 주고 거기서 수수료 떼먹는 거잖아요. 양아치예요. 정말 양아치. 기업들은 이걸 너무 좋아라 하잖아요. 모든 책임과 의무를 떠넘길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하죠. 그걸 나라에서 용인하는 거죠. 알고 보면 노동자의 피와 땀을 뽑아서 회사를 먹여 살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나라에서 그걸 자꾸 권장하고,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자꾸 이걸 확장시키고, 그런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세상에서 우리 아들딸이 커서 직장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정말 소름 돋고 끔찍해요.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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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호 외쳤잖아요. "우리가 월급 많이 달라는 거 아니다. 우리는 해고 없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 그렇게 외쳤는데 그게 됐잖아요. 해고 없는 정년이잖아요. 근데 그 뒤로 뭔가가 채워져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죠.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레벨에서 밑이 아니라 동등한 것을 원하는데 지금은 아주 밑이잖아요. 우리 월급에서 거의 100만 원 정도를 못 받고 있으니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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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밥도 안 차려주고' 무슨 투쟁이냐는 말을 듣는다. 여자가 무슨 노숙이냐는 말을 듣는다. 이런 차별의 말이 곳곳에 있다. 사생활 간섭(주말에 뭐 하는지를 캐묻는 일), 성역할 고정 관념(여자의 주된 일은 애들 밥 차려주는 거라고 말하는 일), 가사일이나 허드렛일 강요(식사할 때 막내 여자 직원이 숟가락이라도 놓아야 하는 일) 등. 여성들이 어디서나 겪는 일이면서, 일터에서는 더 빈번하게 하는 경험이다. 그런데도 '이것도
차별인가? 성희롱인가?' 생각하다가 대응할 타이밍을 놓친다. 울화와 우울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계약 종료나 퇴사 날이 다가와 있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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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기에 끝까지 투쟁했던 1,500명은 깨어 있는 사람, 볼 줄 아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돈을 떠나서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 같아요. 이 사람들은 장애인이든 아니든 인간적인 대우를 안 해줬기 때문에 싸운 거고. 우리가 정규직이 되었다고 해서 돈을 더 많이 받는다거나 그러진 않잖아요.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인간적인 삶을 정말 살고 싶었던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이라고 느껴져요. 억울함을 알았던 사람들. 그 억울한 삶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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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왔던 길이 후회스럽다든가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최선을 다해 살았고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아요. 부끄럽지만 않으면 되는 거 같아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우리가 옳다." 우리가 옳았으니까. 틀렸으면, 부끄러운 행동이었으면 못 하죠. 길바닥에서 자는 게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으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어요. 불합리한 대우와 환경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으니까.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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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제가 전사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노동자임을 스스로 느끼는 시간이었어요. 함께 싸우는 현장에서 노동자의 삶을 느낀 거지. 내가 노동자라는 걸 알게 된 게 엄청 감사했어요. 이제는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 전처럼 쥐 죽은 듯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됐다고 느꼈어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부당하게 나를 대하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전에는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는지 진짜 몰랐거든요. 내가 그 입장에 서니까 이게 당연한 거구나 느꼈어요. 우리가 하지 않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고 노동자는 계속 부당한 대우를 받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하는 거죠.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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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0일 새벽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 41명이 '대량해고 철회'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에 올랐다. 서울 톨게이트는 경부고속도로의 서울 관문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왕복 차로(25차로)가 있다. 자회사를 거부한 톨게이트 노동자 1,500명의 직접고용 공동투쟁은 고공농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가 함께 고공농성을 한 역사가 있을까? 2박 3일 정도
로 끝날 것이라 예상하고 캐노피에 오르며 시작된 고공농성은 98일까지 이어졌고 가장 마지막까지 고공농성을 벌였던 민주연합의 3인 중 한 명인 김경남 씨를 만났다.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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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쓰면 다 해주는 나라, 공정·공평이 무너진다." "표 끊는 아줌마." "단순한 노동이라 기계로 대체되는데 정규직 시켜주면 혈세 낭비." 이 말들은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미 법원이 도로공사는 수납노동자를 직접고용하라는 판결을 했기 때문에(1심 2015년, 2심 2017년) 노동자들은 도로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할 수 있었다.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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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한국도로공사는 자회사 고용을 거부하는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 1,500명을 해고했다. 그해 여름 해고된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넓은 왕복 25차로 톨게이트의 지붕(캐노피) 위로 올랐다. 처음에는 2박 3일, '커피믹스 대용량 한 박스'를 다 먹으면 내려가겠거니 했던 고공농성은 98일까지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간명했다. 정규직 전환. 기존 용역업체 소속이던 요금수납 노동자에게 도로공사의 자회사 소속 노동자가 되는 것은 기회일 수 있었다. 실제로 6,500여 명의 요금수납 노동자 중 5,000명가량이 도로공사측의 제안대로 자회사로 옮겨 갔고, 자회사 전환을 거부한 1,500명은 해고되었다. 그들은 해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회사가 아닌 도로공사 정규직 전환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싸움을 하는 동안 언론보도는 충실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왜 싸우는지에 대한 심층보도는 드물고 귀했다. 소란스럽고 폭력적인 시위 현장과 시민의 불편을 다루는 기사가 대부분이었고 심각한 비난과 악성 댓글이 달렸다.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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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식, 비정규직 노동자를 인식하는 구조, 차별이 정당화되는 논리의 한가운데에는 능력주의가 자리한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싸움은 그동안 온정주의에 가려져 있던 차별을 정당화하는 온갖 주장들, 가령 "차별은 나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별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갖는 허위와 위선을 드러냈다. '표 파는 아줌마들'이 공기업 정규직화라는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비난은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에 걸맞은 능력을 지녔기에 비정규직으로서의 처우가 합당하다는 능력주의적 주장의 맨얼굴이다. 여기에 더해 청와대 경제수석의 톨게이트 요금수납 업무는 곧 '사라질 일자리'라는 확신에 찬 발언은 능력주의의 기치를 내건 비난들에 불을 붙였다. (398)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기선, 랑희, 슬기, 이호연, 타리, 희정, 치명타 (그림), 전주희 (해제)/한겨레출판 20231030 408쪽 20,000원
부당한 힘에 맞서 한 사람이 저항을 시작할 때, 그 저항은 시간과 생사와 한계와 성패를 넘어 항구적인 인간 선언이다. 취약함을 노리는 비열한 자들의 모욕과 보복에 맞서 "우리들의 취약함"을 연결해 저항할 때, 그 투쟁은 항구적으로 혁명적이다. 톨게이트에서 밥을 벌던 여자들이, 새벽을 열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미쳤다. 독한 년. 겁 없는 여자들. 원룸에서 나를 마주함. 이혼보다 급한 투쟁. 피부에 착착 감기는 연대. 누구 하나 떼어놓고 가지 않겠다. 가오 빠지지 않게. 배신은 죽어도 싫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모든 게 새롭다. 아, 그 희열... 그 여자들의 말이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 출구는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의 말과 내력과 기록 속에 있다. (최현숙, 추천의 글)
톨게이트 투쟁은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났다. 이들이 투쟁 기간 동안 외친 '우리가 옳다'는 구호는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