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수의 책그림
- 달과 6펜스는 둘 다 동그랗게 은빛으로 빛나지만 각각 다른 이상을 가리킨다.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비유한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6펜스가 아닌 달을 선택한 것이 다행스러웠다.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물어보곤 했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지 않아?"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6펜스가 아니라 달을 택할 거야.' 그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남들이 정한 기준대로 살지 않겠다고,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서 가장 괴짜이고 독단적이고 예술에 미친 스트릭랜드를 닮겠다고. 사실은 당신도 책임을 몽땅 벗어 던지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보고 싶지 않냐고, 어린 시절 꿈을 이루고 싶지 않냐고 되물었다. (48)
- "우리는 앞면과 뒷면이 아닌 옆면으로 동전을 세우는 방법을 탐색하기 위해 공부를 해. 뭔가를 말하기 전에 자신이 어디까지 무지한지 깨닫고 말을 해. 여유 부릴 틈이 없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 (76)
- 기본 인문 소양을 닦아둔 것도 잘한 일이다. 근본적이고 큼직하고 커다란 책을 어릴 때 봐두길 잘했다. 10대, 20대에는 책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발견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본의 아니게 작은 그릇에 무언가를 담는 독서가 아니라 내 그릇을 계속해서 부시고 또 부시는 독서를 해왔던 것 같다.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그때 나는 내 그릇을 키우고 내 안에 큼직큼직한 공간을 만들었던 것 같다. (81)
- 책에는 '구성'이 있다. 작가의 생애와 생각이 순서대로 편집되어 한 인간의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화집 감상은 내겐 선배, 이 업계의 길을 먼저 간 사람의 노트를 훔쳐보는 일이다. 하여 수업 노트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전시회 한 번 연적 없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화가를 책 한 권으로 만난다. 어떻게 이 종이 더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139)
- 표지 작업을 꾸준히 하며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다 보니 어쩐지 책을 더 사고 싶다. 편집자 친구를 만났을 땐 단지 좋은 책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샀지만, 이제는 출판계에 발가락 두 개쯤 담그고 있는 신세다 보니 내가 속한 산업을 위해 나의 자본을 쓴다는 느낌이다. 내가 몇 권 산다고 산업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좋은 책을 보고 주변에 소개하고 사람들에게 자꾸 떠들다 보면 내가 속한 산업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커지지 않을까, 이 산업이 커져야 나도 먹고살 수 있다는 두루뭉술한 계산을 해대며 또 책을 사고 만다. (150)
- 고미 타로는 이런 말도 한다. "책과의 만남이라는 건 개개인의 인생에 걸친 사건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반드시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는데 책이라고 그럴까. 누구를 이기기 위해 책을 고르는 모습은 이제 나에게 자연스럽지 않다. 마치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벌어진 사건을 선물처럼 받아들이듯, 요즘은 우연히 다가오는 책 한 권 한 권을 소중한 만남으로 여기며 즐기려 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책을 읽은 후 아이들에게 독후감을 쓰라고 시키지 않는다. 대신 '또 읽고 싶은 책이다', '친구에게 추천하고 싶다' 같은 항목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이렇게 읽으면 분명 마음에 부담이 덜 할 것 같다. 어린 시절에 읽고 나서 무언가를 반드시 꺼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즐기는 마음으로 책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169)
- 산책을 다루는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사버린다. (188)
-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두 번 볼 책을 찾기 위해서다. 어떤 책이든 첫 독서는 두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책 한 권을 찾아 나서기보다 나와 어울리는 책을 두 번 보는 게 더 즐겁다. 정말 마음에 들면 작업하는 책상 곁에 두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탐독한다. 이 책들도 마찬가지. 여러 번 자주 읽는데, 그때마다 항상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 단지 책 속 인물이 아닌 동료로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현실에 묶여 있다는 감정이 들면 어김없이 꺼내 든다. 아무 곳이나 펼쳐도 내게 필요한 말이 잔뜩 적혀 있다. (221)
- 처음 '책에 대한 책'을 써보자고 제안받았을 때, 감히 내가? 하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많이' '좋은 책'을 읽지 않았을 거란 막연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나는 운명 같은 책을 꾸준히 만나 왔음을, 그 책과 만나며 삶의 방향을 결정해왔음을. 나만의 독서 역사, 나만의 독서 지도를 갖고 있음을. 책이 1순위가 아니었던 적은 있을지라도 무관했던 시절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232)
반지수의 책그림/반지수/정은문고 20240229 236쪽 23,000원
산책을 좋아하고 산책에 관한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사버린다는 작가는 《보통의 것이 좋아》에서 "봄날의 산책은 남은 일 년을 살아갈 힘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산책에 관한 최고의 예찬으로 남았습니다.
어떤 책을 봤을 때 표지 그림이 눈에 익어서 찾아보면 반지수 작가의 그림이더군요. 부드러우며 정감이 넘치는 따뜻한 그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가가 그렇게 싫어했던 '읽은 책과 그린 그림'에 대한 독후감을 읽었습니다. 글과 그림을 보며 또 다른 인생 매뉴얼을 찾았습니다.
어떤 책을 봤을 때 표지 그림이 눈에 익어서 찾아보면 반지수 작가의 그림이더군요. 부드러우며 정감이 넘치는 따뜻한 그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가가 그렇게 싫어했던 '읽은 책과 그린 그림'에 대한 독후감을 읽었습니다. 글과 그림을 보며 또 다른 인생 매뉴얼을 찾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