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인이 된 이후에 나는 두 곳의 대안학교에 다녔다. 첫 번째 대안학교는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 작은학교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학교인데 나는 서른여섯 살에 영어교사로 입학했다. 교사는 채용되어 근무한다는 게 세상 사람들이 쓰는 표현이지만, 학생들 못지않게 철없는 교사였던 나에게는 입학했다는 말이 어울린다. 또 다른 학교는 덴마크 세계시민학교(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IPC)다. 이곳에는 서른아홉 살에 진짜 학생으로 입학해서 두 학기를 다녔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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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가까이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학교라면 힘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직접 학생이 되어, 그게 어떤 교육인지 한번 받아 보고 싶었다. 학생이 가장 행복한 나라 중의 하나라는 덴마크에 가서 학생이 되어 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저 선생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별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지리산을 뒤로하고 먼 북유럽으로 떠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이라 불리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덴마크로 향하는 시절이었다. 그들 모두는 먼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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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IPC와 같은 시민학교를 덴마크에서는 폴케호이스콜레 (folke højskole)라고 한다. 줄여서 호이스콜레(højskole)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쓰는 IPC에서는 '포크 하이 스쿨(folk high school)'이라고 번역해서 부른다. 평범한 사람, 민중이 누구나 갈 수 있는 교육기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이 스쿨이라고 번역된대서 고등학교는 아니다. 이곳에는 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대학에 가거나 본격적인 직업을 갖기 전에 온다. 이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긴 여행이나 자원봉사를 하며 1~2년간의 갭이어(gap year)를 보내는 중이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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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사란 언어적인 이유로든 심리적인 이유로든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학생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구나. 지금 이 학생의 상태가 어떤지,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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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선생님과 약간 논쟁을 했는데, 수업이 끝나니 선생님에게 실례가 되는 말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서배스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선생님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수업 시간에 표현하는 학생이 있다는 데에 감사해야 해."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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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교에 왔을 때의 실망, 학교에 대해 가졌던 불만은 내가 품은 기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기대가 공정한 것이었냐고, 그리고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묻고 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덴마크 학교의 자신감이다. 학교가 일방적으로 학생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 일방적으로 학교에 주는 것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진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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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중동 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난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이렇게 세계와 끊임없이 토론하며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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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정의! 기후 정의!" 북유럽 사람들, 특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청년들이 집회에서 자주 외치는 구호다. 기후변화는 주로 북반구에 있는 부유한 나라들이 대량 생산과 소비, 생태계 파괴를 통한 개발을 계속했기에 일어났다. 그런데 급격한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농토의 황폐화, 식량난과 사회 불안 등의 고통을 겪고 있는 지역은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청년들은 기후 정의를 요구한다. 기후변화는 환경과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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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나오기로 한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못해서 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건 그 학생의 실패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비록 성인이지만 아직 어린 학생 혼자서 퇴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고자 애쓴다. 너는 학교를 떠나야 하지만, 이것은 IPC라는 학교의 행정 절차에 따른 것일 뿐 결코 네 삶의 실패가 아니라고.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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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경쟁이 심하지 않은 나라다.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누가 일등을 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보통 정도로만 해내면 만족하는 태도를 자랑으로 삼는다. 대신 누군가가 뒤에서 혼자 힘들어하거나 부당한 취급을 받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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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트루드 선생님은 북유럽 문화권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얀테의 법칙을 알려 준다. 한 개인의 뛰어난 성취보다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중요시하는 삶의 태도가 담긴 얀테의 법칙 중에는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항목이 있다. 덴마크에서는 남보다 더 잘 사는 게 자랑이 아니다. 집을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타며 돈 있는 티를 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걸 창피하게 여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기꺼이 더 많은 세금을 낸다. 그것이 촘촘하고 탄탄한 복지 시스템을 지키는 근본정신이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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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복지 제도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중요해. 우리가 신경 써서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거든. 요즘 자라나는 덴마크 아이들은 복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싸워 왔다는 걸 교육해야만 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지. 그 옛날 농부들이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면 그다음에는
노동자들이, 여성들이 나섰고, 지금은 이민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어.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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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 어떻게 보면 아주 매력적인 시대야.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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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미술실에서 나무를 그리다가 온갖 공을 들였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순간이 왔다. 그때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캐트린에게 말했다. 그러자 캐트린은 나에게 질문했다. "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304)
나의 덴마크 선생님/정혜선/민음사 20220128 320쪽 16,000원
덴마크에는 누구나 갈 수 있는 대안 학교인 호이스콜레가 70여 개가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알바하다가, 바텐더를 하다가, 공항에서 청소하다가 입학합니다. 시험도 없습니다. 학업 성과는 젊은 시절 호이스콜레를 다녀 본 부모나 조부모가 추천하는 걸로 알 수 있습니다. 졸업생들은 이 학교가 나에게 큰 변화를 줬다고 얘기합니다. 스무 살 정도 나이가 많은 동양 여자에게 나이를 묻거나 결혼했느냐고 대놓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정치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언제나 당신을 선택한다는 걸 가르칩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객지 같은 학교가 늘었으면 합니다.
덧. 오탈자
93쪽 1행 나의 그의 빠른 영국식 → 나는 그의 빠른 영국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