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다 -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
- 볕 좋은 봄날 오후였다. 예술 평론 세미나에 갔다가 3년 전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조성되었던 매몰지가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땅이 되었다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딱히 내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그 말이 또렷하게 내 귀에 박혔다. (56)
- 우리나라에서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것은 2000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 기록이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최초 발생한 것이었지만 효과적인 백신 정책을 활용해 2,216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전염성 강한 구제역의 특성상 해외에서도 우수사례로 꼽힐 정도로 빠르고 완벽한 대응이었다. 2년 후인 2002년 전 국토를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기간 중에 다시 구제역이 발생했다. 두 번째였지만 당시만 해도 구제역은 축산업 종사자들에게조차 낯선 질병이었다. 당연히 국민적 이해도, 협조도 없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정부는 16만 155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으로 구제역 사태를 종결시켰다. 그 후 잠잠했던 구제역은 2010년에 다시 발생했는데, 그해에만 무려 세 차례나 발생했다. 1월에 발생한 6건의 구제역으로 28일간 5,956마리, 4월에 발생한 11건으로 29일 동안 4만 9,874마리, 11월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145일간 무려 347만 9,962마리가 살처분되었다. (82)
- '사료 소비', '생산량 감소', '수출 제한', '비용 절감'. 살처분 정책 어디에도 생명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인류가 아끼고 지킨 것은 오직 시간과 비용뿐이었다. 슬픔과 수치가 밀려들었다. (91)
- 결국 자비도 한계도 없는 대량학살로 145일 동안 국내 돼지의 34퍼센트인 331만 마리의 돼지와 국내 소의 5퍼센트인 15만 마리의 소를 포함해 총 347만 9,962마리의 동물들이 파묻혔다. (94)
-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2003년부터 2017년까지 14년 연속 자살률 1위다. 산업재해 사망률도 1위, 그밖에도 가계부채, 남녀 임금격차, 노인 빈곤율, 최저임금, 근무시간, 이혼 증가율, 낙태율, 사교육비 지출 등 불명예스러운 1위가 차고 넘친다. 건강한 동물을 파묻는 것 외에도 국가의 위신을 끌어올릴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97)
-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유한하다. 누구도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살처분은 죽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존엄의 문제다. 존엄? 그렇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생명의 존엄도 경제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농장동물에게는 애초에 잉태가 없었다. 그들은 생산되고 소비되고 폐기될 뿐이다. (100)
- 모든 생명체는 태양과 땅, 물, 그외에 다른 생물들에게 빚을 진다. 자기가 쓸 에너지를 직접 만드는 건 식물뿐이다. 사슴을 잡아먹는다고 사자의 도덕성을 비난할 수 없다. 육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육식이 범죄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102)
- 좁은 공간에 갇혀 살을 찌우는 사료만 먹고 자란 동물은 덩치만 클뿐 건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동물의 건강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소 2~3년, 돼지 5~6개월, 닭은 35일, 출하되는 그 순간까지 숨만 붙어 있으면 도축이 가능하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고기를 얻기 위한 이 모든 과정을 먹이사슬에 의한 자연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처분 당시 구덩이에 내던져진 돼지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 보는 흙과 깨끗한 공기를 맡으며 즐거워했다는 누군가의 기억이 내 뒷덜미를 잡았다. (105)
- 구제역은 전파 속도는 빠르지만 식품의 안전이나 인간의 건강은 전혀 위협하지 않는 비교적 경미한 질병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수지타산을 명분으로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땅에 파묻었다. 동물들은 고통 속에 죽어 갔고, 땅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그리고 오염된 땅에서는 공공연히 농사가 시작되었다. 세상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막되어 가고 있었다. (124)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전염병 만연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 신선한 바람과 맑은 물, 동물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본능에 따라 살 수 있는 농장, 답은 그 안에 있다. 동물의 행복이 곧 인간의 행복이 되고, 지구의 행복이 된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이치다. 어린 아이도 알 법한 이런 해결책을 우리 사회는 왜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까? 생산자의 수익 때문일까? 아니면 소비자가 누리는 혜택 때문일까? (168)
- 살殺(죽일 살) + 처분處分(행정·사법 관청이 해당 법규를 적용하는 행위). 국민들에게 내려진 국가의 명령. 국가는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에 따라 예외 없이 파묻었다. 그곳에 죽음은 없었다. 다만 상품이 폐기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만 작동되고 있었을 뿐이다. (174)
묻다/문선희/책공장더불어 20190308 192쪽 13,000원
2010년 겨울에 발생한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347만 9,962마리의 가축과 648만 마리의 가금류가 땅에 파묻혔습니다. 그렇게 전국 4,799곳에 매몰지가 생겼습니다. 사진작가인 저자는 매몰지 4,799곳 중에서 100곳을 무작위로 골라 2년 동안 돌아다니며 기록했습니다.
"살처분 당시 구덩이에 내던져진 돼지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 보는 흙과 깨끗한 공기를 맡으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매몰된 땅은 심각하게 오염됐습니다. 살처분은 생명에 대한 배려는 아예 없고, 오로지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인간의 대량학살이었습니다.
묻다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땅에 왜 파묻었냐고 물을수록 사람답지 않아 슬픔과 수치만 묻어납니다.
"살처분 당시 구덩이에 내던져진 돼지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 보는 흙과 깨끗한 공기를 맡으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매몰된 땅은 심각하게 오염됐습니다. 살처분은 생명에 대한 배려는 아예 없고, 오로지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인간의 대량학살이었습니다.
묻다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땅에 왜 파묻었냐고 물을수록 사람답지 않아 슬픔과 수치만 묻어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