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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가족각본
  • 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각본에 따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딸 또는 아들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성인이 되면서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등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가족각본은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 따르는 걸 평범한 삶이라고 여기고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때때로 버겁게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 가족각본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 살피지 못한다. 다만 간혹 혼란을 경유해 가족각본의 실체가 감지된다. 가령 '성소수자' 혹은 '퀴어'queer라고 불리는 인물이 무대에 등장하는 거다. 이 낯선 인물의 등장이 가족각본에 당연하게 정해져 있는 역할을 '꼬이게' 만든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가족 언어와 행위의 대부분이 성별에 기반한다는 걸 깨닫는다. (9)
  •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개탄의 구호를 처음 접한 것이 2007년 최초의 차별금지법이 발의될 즈음인데, 이 익숙하고 오래된 구호가 문득 흥미롭게 보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주장에 등장한 소재가 왜 하필 며느리였을까. 동성결혼이 인정되기까지 거센 반대를 겪는 일이야 한국도 여느 나라와 다를 것 없겠지만, 그렇다고 며느리와 사위가 이토록 핵심적인 반대 이유로 등장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11)
  • 역사적으로 성차별적이며 억압적 가족제도를 표상하는 '며느리'가 '동성애 반대'의 이유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도 한국사회가 막혀 있는 지점을 정확히 드러낸다.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이 두 단어가 가족제도의 경직성이라는 하나의 문제로 연결된다. (39)
  • 오히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질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이 구호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면, 먼저 며느리는 여자, 사위는 남자여야 한다는 관념을 의심하고 질문해보면 좋겠다. 며느리의 역할을 남자가 하면 왜 안 되며, 사위가 여자이면 무엇이 문제인가? 며느리와 사위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원치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반대할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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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김지혜/창비 20230801 248쪽 17,000원

가족각본이란 "가족 구성원이 태어나면서부터 딸·아들·손주·부인·남편·부모·며느리·사위 등 특정 역할을 기대받고 수행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가족이라는 견고한 각본에 존재하는 차별과 혐오를 해부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각본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아이를 낳는 것을 노동력 생산으로 보는 세상이라면 저출생과 인구절벽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불변의 가치는 아닙니다. 새로운 가족제도를 법과 사회가 수용하질 않거나 고의로 지연하고 있습니다.

정상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정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돌봄에서 소외됩니다. 가족각본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한 가족생활을 차별하는 숨은 억압입니다. 깨뜨릴 때입니다. 한참 늦었습니다.

처단,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처단
그날 계엄을 막지 못했다.

노동조합원과 노조 상근자인 '그녀'와 '그녀의 아내'. 그녀의 공식적인 신분은 아내의 '간병인'이었다. 그녀의 아내가 수술받은 날 대통령은 2차 계엄을 선포했다. 이주노동자로 와서 귀화한 알(AL)은 집회에서 계엄군의 총에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특정 교통공사 소속의 특정 지하철역 역장이 '특정 장애인 단체'라 부르며 증오하는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계엄군은 총을 쏘았다. 특정 지하철역 역장과 특정 교통공사 직원들이 먼저 총에 맞았다. 법적으론 여성이지만 여자가 아닌 단단은 계엄군이 난사하고 학살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광장에서는 극우파 집회 선동가이자 자칭 종교지도자가 계엄에 찬성하는 집회를 열었다. "계엄을 논하는 집회와 시위는 정치활동이다. 정치활동은 포고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종교지도자들을 사칭하는 선동가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독재자의 관점에서는 위협이 될 뿐이었다.(89)" 그들을 향해 계엄군이 발포했다.

특정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1208호 보호자를 병원에 들이닥친 군인이 쏘았다. 노동에 지쳐 잠이 드는 바람에 투표하지 않았던 양 간호사는 계엄군에게 끌려갔다.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도 사람(56)"이 살고, "연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서나 달려왔다.(58)" 그러나 계엄군 앞에서는 무력했다. 모여 항의하는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체포해 차량에 실었다. 심지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총으로 쏘고 감방에 가뒀다. 감방에 있던 사람들은 차례차례 끌려 나갔다. 모두 죽였다. 그렇게 어디에도 기록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됐다.

계엄은 "배신이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또다시 저지른 거대하고 끔찍한 배신이었다.(106)" 저 대통령은 성범죄자이자 가짜 무당의 수첩에 적힌 포고령으로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 어떤 목숨을 빼앗았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107)" 그날 계엄을 막지 못하자 사람들은 언제쯤 타인을 배신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데모꾼 정보라 작가는 동지들과 함께 계속 싸울 것이라며 "투쟁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지만 내가 지키지 않으면 빼앗기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란이 나에게 남긴 교훈(148)"이라고 했다. 죽은 자들이 앞서서 처단을 시작했다. 산 자여 따르라.

처단/정보라/상상스퀘어 20260311 176쪽 14,000원

지속 불가능한 불평등 - 사회정의와 환경을 위하여

지속 불가능한 불평등 - 사회정의와 환경을 위하여
  •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미 불의로 병든 사회에서 불평등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대개 바이러스에도 가장 많이 노출되었다. 힘들게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팬데믹 초기에 마스크나 변변한 보호 장비도 없이 선택 아닌 선택을 해야만 했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 일을 하러 나갈 것인가, 건강을 지키려다 일자리를 잃을 것인가. 대형 상점 계산원, 요양보호사, 더 넓게는 사회의 기본적 용역을 담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사회의 물자 기지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익명의 수백만 시민이 매일매일 일하는 그 모든 산업 현장에서. (9)
  • 선거운동에 민간자금이 들어갈 때의 근본적 문제점은, 소득이 높은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댈 수 있기 때문에 상위층에게 호감을 얻는 후보가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인 1표'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차츰 흐려지고 '1달러에 1표' 식이 되어버린다. 이 같은 상황은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을 영속시킬 수 있고, 그러한 불평등 자체가 정치 활동을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42)
  • 공공자산의 감소와 민간자산의 폭증은 개인들 간의 불평등이라는 면에서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단 국가의 공공자산이 줄어들면 교육, 공공보건, 생태 전환에 투자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기가 어려워진다. 앞으로 세세하게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간자산 증가는 개인이 물려받는 세습자산의 불평등과 궤를 같이 한다. 자산은 소득보다 집중되기 쉬운데, 소득이 오르는 속도보다 부가 축적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96)
  • 경제적 불평등은 여러 원인에서 비롯되고 그중 어느 한 원인을 따로 떼어내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게다가 불평등 심화 경향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지만, 국가별 특성이 다수 관찰된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포괄적인 설명을 경계해야 한다. 1980년대 초에 시작된 무역 및 금융 세계화와 교육 불평등이라는 맥락 안에서의 기술 진화는 불평등이 증가하는 경향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 국가별 차이까지 설명하지는 못 한다. 부자 감세로 인한 사회국가의 쇠퇴, 사회보호망의 수축을 고려해야 이처럼 다양하게 나타나는 양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18)
  • 물의 간접 소비가 가장 크게 일어나는 부분은 식품 생산이다. 밀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1,200리터의 물이, 쇠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1만 3,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생활 수준의 차이, 섭생 방식의 차이가 국가 간 물 소비 불평등에 크게 작용한다. 북미인은 평균적으로 하루 7,000리터의 물을 소비한다. 영국인은 3,400리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은 2,600리터, 중국인은 1,900리터를 소비한다. 전 지구 차원에서는 인류의 필요를 충족하기에 충분한 양의 담수가 존재한다. 하지만 식수 자원의 근본적 문제는 분포가 고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인구의 3분의 2는 적어도 연중 한 달은 물 부족에 시달린다. 이러한 물 부족은 모든 대륙에서, 선진국과 빈곤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그렇지만 물 부족의 여파는 선진국보다 빈곤국에서 더 비극적으로 나타난다. (140)
  •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공해와 환경 파동에 더 크게 무너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들은 피해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경제 불평등, 환경불평등, 정치 불평등이 뒤섞인 악순환이다. 현대사회는 환경 위험과 그 위험에 대처할 수단을 사회적으로 불공평하게 분배하고 있다. 그로써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은 자동으로 강화된다. (170)
  • 자원에 대한 접근 불평등, 위험에 대한 노출 불평등, 환경의 질적 저하에 따른 책임 불평등이 그 세 가지 형태다. 여기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일단 경제적 불평등은 환경불평등을 상당 부분 결정짓는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에너지 같은) 상품으로서의 천연자원에 접근하기 힘든 반면, 환경 위험에는 항상 더 많이 노출되고 피해에는 더 취약하다. 게다가 경제적 불평등은 온실가스 배출 불평등에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되는 경향은 환경정의라는 면에서도 결코 이롭지 않다. (202)
  • 우리가 살펴본 대로, 환경보호에 역행하지 않고도 경제적 불평등은 얼마든지 완화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세방향으로 접근했다. 첫 번째는 대중교통과 에너지 및 수도 공공서비스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인프라에 대한 투자와 가계에 대한 지원으로 사회적 규준 변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두 번째 방향은 새로운 환경세를 고안하고 도입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세는 아주 잘 설계되어야만 환경과 사회적 보호 사이에서 빚어질 수 있는 갈등을 뛰어넘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환경불평등을 완화하려면 유럽 국가들과 신흥국들이 개방적이면서도 투명한 불평등 측정 플랫폼을 개발해야 한다. 이 세 방향으로의 변화는 전부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일부 국가에서 현재 진행 중이다. 이러한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다 보면 공공정책은 결국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취하게 될 것이다. (248)
  • 경제불평등이 현대 세계의 지속 불가능성의 실질적 요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이 민주 사회로서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경제활동이라는 관점에서도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불평등은 사회 전체의 보건 및 사회보장을 악화시키고, 환경에도 피해를 입힌다. (269)

지속 불가능한 불평등/뤼카 샹셀Lucas Chancel/이세진 역/니케북스 20230401 288쪽 16,800원

"샹셀 등이 분석한 한국의 사례를 보면, 2021년 기준으로 한국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탄소배출량은 14.7톤이지만 소득 상위 10퍼센트는 54.5톤, 상위 1퍼센트는 무려 180톤에 이른다. 반면 하위 50퍼센트는 고작 6.6톤밖에 배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만약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절반으로 줄이는 목표를 세웠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모든 국민이 1인당 평균 약 7.4톤씩만 배출해야 한다. 가장 평등하게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예외 없이 국민 개개인이 똑같이 7.4톤씩 배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위 50퍼센트 국민들은 오히려 지금보다 0.8톤을 더 배출해도 된다. 반면 상위 1퍼센트가 7.4톤만 배출하려면 무려 172.7톤을 줄여야 한다. 이 지점이 사실상 이 책의 핵심 주장이며 세계불평등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논지다." (...) "경제적 불평등은 환경불평등을 상당 부분 결정 짓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에너지 같은) 상품으로서의 천연자원에 접근하기 힘든 반면, 환경 위험에는 항상 더 많이 노출되고 피해에는 더 취약하다. 게다가 경제적 불평등은 온실가스 배출 불평등에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되는 경향은 환경정의라는 면에서도 결코 이롭지 않다." (282~283)

토마 피케티와 함께 파리경제대학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 공동 소장인 뤼카 상셀이 환경불평등을 다뤘다.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후 불평등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진단은 옳다. 실천이 늦는 건 우리의 죄다.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 이 기록이 시작된 것은 이쯤이다. 98일간의 고공농성, 145일간의 본사 점거농성 그리고 매일 바리케이드와 방패를 앞세운 경찰에 의해 그들에게만 막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들의 싸움은 많은 주목을 받으며 알려졌으나 싸움의 순간들이 치열하게 이어지기에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모였다.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한, 저마다 지닌 세상 단하나뿐인 면모와 이에 연결된 삶과 노동의 이야기, 싸우며 다시 맺는 관계에 대해 그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었다. (7)
  •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기, ‘불온한’ 사람들이 떼 지어 자신들의 ‘소유’도 아닌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교통 혼잡과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고 ‘감히’ 길거리의 자동차 경적보다 큰 소음을 내며 ‘말하고 있다’. “삶은 끝없는 ‘경쟁’이란 ‘절대 진리’를 어기며 타인의 기회를 뺏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13)
  • 우리 집이 큰집이라 가족들이 다 우리 집으로 와요. 나는 못 간다고 전화했더니 난리가 난 거야. 이혼을 하니 어쩌니 막 이래. 그래서 내가 딱 잘라 이야기했어. 이혼하겠다. 그런데 나 바쁘다. 그러니까 바쁜 거 해놓고 하자. 이게 순서가 있잖아. 이혼이 급한 게 아니고, 투쟁이 급한 거거든. (37)
  • 인터뷰 과정에서 톨게이트 수납 업무가 "아줌마들에게는 좋은 일자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이유는 3교대 시스템에서 근무를 바꾸어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과 월급이 밀리지 않고 제때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월급은 올라가지 않고 최저시급을 유지하고, 1년 단위 계약으로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 복지는커녕 근무복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환경인데 (거기다 성희롱에 갑질까지 횡행하는데) 좋은 일자리라고?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그리고 톨게이트 수납 업무가 '좋은 일자리'일 수 있는 것은 '아줌마들에게는'이라는 수식어 때문이라는 점에서 여성노동의 현실 또한 뒤돌아보게 된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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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노피에 매달린 말들/기선, 랑희, 슬기, 이호연, 타리, 희정, 치명타(그림), 전주희(해제)/한겨레출판 20231030 408쪽 20,000원

부당한 힘에 맞서 한 사람이 저항을 시작할 때, 그 저항은 시간과 생사와 한계와 성패를 넘어 항구적인 인간 선언이다. 취약함을 노리는 비열한 자들의 모욕과 보복에 맞서 "우리들의 취약함"을 연결해 저항할 때, 그 투쟁은 항구적으로 혁명적이다. 톨게이트에서 밥을 벌던 여자들이, 새벽을 열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미쳤다. 독한 년. 겁 없는 여자들. 원룸에서 나를 마주함. 이혼보다 급한 투쟁. 피부에 착착 감기는 연대. 누구 하나 떼어놓고 가지 않겠다. 가오 빠지지 않게. 배신은 죽어도 싫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모든 게 새롭다. 아, 그 희열... 그 여자들의 말이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 출구는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의 말과 내력과 기록 속에 있다. (최현숙, 추천의 글)

톨게이트 투쟁은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났다. 이들이 투쟁 기간 동안 외친 '우리가 옳다'는 구호는 옳았다.

모자무싸 인상네컷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쓸모없다는 건 무서운 말이야.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는 선고 같거든.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정지, STOP.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혼자 하면 지쳐요. 옆에서 재밌다 재미없다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덜 지쳐요. 제가 봐줄게요, 옆에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무가치함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같이 사는 거지. 비 오는 날 젖은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찝찝해도 멈출 수는 없으니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Ximfit, 心fit. 같이 마음을 맞춰요.

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 현재 대한민국에 상호 등록된 출판사가 약 9만 8천여 개다. 그러니까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름이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 이름 짓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26)
  •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 마름모의 슬로건은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가 되었다. (...) 나는 이렇게 뜬금없는 출판사 이름에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갖다 붙여놓은 마름모 출판사의 대표다. 평행하는 선들은 만나지 않지만, 마름모의 세계관 안에선 만나게 된다. 서로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던 대결 구도들이 마름모의 세계관 안에서는 합의점을 찾게 된다. 이것은 나의 고급 유머이자 도도한 아이러니의 발현이다! (28)
  • 인맥이니 사람 관리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의식적으로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를 장착해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경험으로 배운 '처세술'이 하나 있다면, '진심'이다. 고마운 일에는 고맙다고 하고, 죄송한 일에는 죄송하다고 한다. 반면 죄송하지 않은 일에는 절대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하지 않는다. (47)
  • 모종의 위계가 있는 인적 네트워크. 그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내가 혼자 일하는 작업실(우리 집)엔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인쇄소 부장님과 여러 작가님들과의 소통이 있지만 '정치'가 없다. 세상 평화로운 곳이 나의 작업실이다. 위계와 정치가 빠져나간 자리에,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에너지가 들어찼다. (102)
  • 출판이 어려운 것은 무조건 '잘 팔리는' 책으로만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남을 수는 있을지라도 이름을 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두가지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싶다. 이건 나만의 포부가 아니라 많은 출판인들의 희망일 것이다. 우리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113)
  • 펑펑 울었다는 그 작가님처럼 나도 오늘 울었다. 이젠 편집 일이 쉬워졌다고 말하곤 했다. 그게 얼마나 용감하고 무식한 말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어쩌면 타성에 젖은 것이거나 일종의 슬럼프에 빠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데 한 명의 작가를 잃었다. 혹독한, 혹독한 날이다. (117)
  • 책은 '좋은 물건'이어야 한다. 팔리는 책을 찾다가 망할 수 있다. '좋은' 책을 찾다가 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확률은? 차라리 좋은 책을 좇자. 그러면 망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이 한낮 자본주의의 무의미한 놀음, 심지어 나무와 사회에 유해하기까지 한 짓이 되었다는 허탈감,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을까. 설령 망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존감까지 잃지는 않을 것이다. (135)
  • 그런 상상을 한다. 모든 편집자가 적어도 한 번은 사장님이 제안하는 연봉을 거절해보면 어떨까? 그런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올려주면 좋고 아님 말고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너 말고도 쓸 만한 사람은 널렸어'라고 생각하는 사장님들에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을까? 우리는 어쪄면 회사에 없으면 아쉬운 인재일지도 모른다. 아아, 이제 나도 사장인데, 이러다가 사장님들한테 몰매를 맞겠지? 하지만 나는 괜찮다. 나는 평생 1인출판사 사장만 할 거니까. (181)
  • 나는 작가가 글을 쓸 때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행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되도록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원고를 썼으면 좋겠다. 내가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그게 다이다. (205)

편집자의 사생활/고우리/미디어샘 20230407 248쪽 16,000원

요람에서 무덤까지 안 해본 장르가 없고 노는 게 제일 좋은 탱자탱자 편집자가 1인 출판사 마름모를 차렸습니다.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 마름모 출판사의 슬로건입니다. 10만여 개의 출판사가 다 흥할 수는 없겠지만, 있어빌리티로 무장하고 10층 빌딩을 올려 작가에게 돈을 많이 뿌리는 편집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동네 공공도서관을 만 개 지어서 책을 내면 만 부는 기본으로 구매하는 사회가 되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樂書 투표권은 종이로 만든 탄환이다

탄환
유시민 가라사대, 투표권은 종이로 만든 탄환이다.

첫투표
제 첫투표는 1987년 12월 16일에 했답니다. DJ를 찍었지만 BTS(보통사람)가 당선됐죠. 한동안 투표하지 않았답니다. 첫사랑만큼 첫투표가 중요합니다. "첫"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가로수
수목원 자랑말고 가로수나 잘 키우자.
시내 시외 구별말고 가로수나 잘 기르자.
정원박람회 그만하고 가로수나 잘 가꾸자.

신성가족
1987년 6월 이전까지 판검새는 군바리, 중정, 짭새에 설설겼지요. 시민이 들고일어나 바꿨더니 지들이 신성가족인 줄 알아요. 부셔야 합니다.

전화번호
전화번호를 바꿨다. 3월 말에 바꾸고, 다시 바꿨다. 지난 번호랑 결별했다. 일 년 안에 전화하지 않으면 바뀐 전화번호를 모른다. 아듀다~~~ 요게 내가 갑이 아니면 어렵지 싶다. 아쉬운 놈이 알아서 연락하세요. 그래서 그런지 바뀐 전번으로 광고 전화가 한 통도 없다. 지금까지는….

Trump is safe
Trump is safe. 총격범은 구금 또는 사망으로 엇갈림. 아까비!!! 미국으로 온 이주민이 총을 썩 잘 쏘진 않았죠. 서부극에 나오는 총잡이들은 엄청나게 과장됐고요. 오죽하면 머리에 권총을 대고 자결하려 해도 연속해서 빗나갔다는 유머가 있지요.

거스러미
거스러미라는 말이 있네요. 거스러미가 거슬리는 오훕니다.

여성
반도 이남에 놈상으로 태어난 게 어마어마한 특혜인지 몰랐습니다. 여전히 여자가 공포 속에 사는지 몰랐습니다. 밤에도 안전한 줄 알았습니다. 놈상은 두고두고 반성합니다. 이북도 공산주의라고 떠벌리지만, 여성차별과 하대가 어마무시한가 봅니다. 오히려 남한보다 더 가부장적이라네요. 그럼에도 북한려성은 장마당에서 이악하게 계시더군요. 아무튼 조선반도는 대대로 여성이 먹여살렸고, 역사적 대전환은 여성이 먼저 했습니다. 빚, 졌습니다.

마라톤
사바스티안 사웨(케냐) 선수가 2026 런던 마라톤 남자부 경기에서 42.195㎞ 풀코스를 1시간 59분 30초에 완주했다. 100미터를 17초로 달리는 속도란다. 두 시간 벽을 깼다.

노동절
Happy Labour Day. 올해부터 노동절로 바뀌며 공휴일로 지정됐다. 늦었지만 법조문도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꾸고요. 내친김에 후딱, 합시다.

전공지식
기계는 국가대표도 있다. 기계체조!!!

로즈데이
오다가 했어. 오다가 했어.

부적
이것은 부적입니다. 맘에 쏙 듭니다. #개작두

잘 되는 회사와 조직
잘 되는 회사는 정문 후문 경비 노동자와 출퇴근 버스운전 노동자도 친절하고요, 잘 되는 조직은 공은 아래로 과는 위로 흐르며 법카 긁으며 생색내지 않는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지방선거
내란공범당이랑 선거하는데 아슬아슬하다는 건, 그쪽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심리적 내란 공감자들이 득실득실하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특히 '사'자로 끝나는 직업군에 내란공감범들이 지지율보다 더 많아 보입니다. 또한 그들의 자식들 대부분이 '사'자 직업군을 기르는 대학에 진학하고 있지요. 이는 앞으로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걸 암시합니다. 저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으니, 앞으로 더 오래 살아가야 할 분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며 결정하길 바랍니다. 그 분기점이 이번 지방선거이지 싶네요.

순살역
도면대로 시공하지 않았으면 뿌시고 재시공해야지요. 지체상금도 계약대로 받아내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지요...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코멘트를 기대한다. 서울시는 2025년 11월 시공사로부터 처음 보고받았으면 즉시 중단하고 재시공하면 됐지요. 왜 쉬쉬하며 계속 진행했을까요? 복마전이라면 이해되네요.

불매와 볼매
기업 불매가 어려운 건 볼매 기업이 드물어서이지 싶다.

교육감
40세인 사람이 16세인 사람보다 그들을 대표하는 더 좋은 정당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는 없다. - 김효연, 《시민의 확장》(스리체어스, 2017), 124쪽

피교육 노동자화된 K-학생들이 과거형 교육감에게 미래를 맡기는 선거라면, 당연히 그들에게도 물어봐야지 싶다. 가중치를 주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선택의 기회는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묻다 -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

묻다 -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
  • 볕 좋은 봄날 오후였다. 예술 평론 세미나에 갔다가 3년 전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조성되었던 매몰지가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땅이 되었다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딱히 내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그 말이 또렷하게 내 귀에 박혔다. (56)
  • 우리나라에서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것은 2000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 기록이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최초 발생한 것이었지만 효과적인 백신 정책을 활용해 2,216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전염성 강한 구제역의 특성상 해외에서도 우수사례로 꼽힐 정도로 빠르고 완벽한 대응이었다. 2년 후인 2002년 전 국토를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기간 중에 다시 구제역이 발생했다. 두 번째였지만 당시만 해도 구제역은 축산업 종사자들에게조차 낯선 질병이었다. 당연히 국민적 이해도, 협조도 없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정부는 16만 155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으로 구제역 사태를 종결시켰다. 그 후 잠잠했던 구제역은 2010년에 다시 발생했는데, 그해에만 무려 세 차례나 발생했다. 1월에 발생한 6건의 구제역으로 28일간 5,956마리, 4월에 발생한 11건으로 29일 동안 4만 9,874마리, 11월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145일간 무려 347만 9,962마리가 살처분되었다. (82)
  • '사료 소비', '생산량 감소', '수출 제한', '비용 절감'. 살처분 정책 어디에도 생명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인류가 아끼고 지킨 것은 오직 시간과 비용뿐이었다. 슬픔과 수치가 밀려들었다. (91)
  • 결국 자비도 한계도 없는 대량학살로 145일 동안 국내 돼지의 34퍼센트인 331만 마리의 돼지와 국내 소의 5퍼센트인 15만 마리의 소를 포함해 총 347만 9,962마리의 동물들이 파묻혔다. (94)
  •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2003년부터 2017년까지 14년 연속 자살률 1위다. 산업재해 사망률도 1위, 그밖에도 가계부채, 남녀 임금격차, 노인 빈곤율, 최저임금, 근무시간, 이혼 증가율, 낙태율, 사교육비 지출 등 불명예스러운 1위가 차고 넘친다. 건강한 동물을 파묻는 것 외에도 국가의 위신을 끌어올릴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97)
  •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유한하다. 누구도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살처분은 죽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존엄의 문제다. 존엄? 그렇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생명의 존엄도 경제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농장동물에게는 애초에 잉태가 없었다. 그들은 생산되고 소비되고 폐기될 뿐이다. (100)
  • 모든 생명체는 태양과 땅, 물, 그외에 다른 생물들에게 빚을 진다. 자기가 쓸 에너지를 직접 만드는 건 식물뿐이다. 사슴을 잡아먹는다고 사자의 도덕성을 비난할 수 없다. 육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육식이 범죄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102)
  • 좁은 공간에 갇혀 살을 찌우는 사료만 먹고 자란 동물은 덩치만 클뿐 건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동물의 건강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소 2~3년, 돼지 5~6개월, 닭은 35일, 출하되는 그 순간까지 숨만 붙어 있으면 도축이 가능하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고기를 얻기 위한 이 모든 과정을 먹이사슬에 의한 자연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처분 당시 구덩이에 내던져진 돼지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 보는 흙과 깨끗한 공기를 맡으며 즐거워했다는 누군가의 기억이 내 뒷덜미를 잡았다. (105)
  • 구제역은 전파 속도는 빠르지만 식품의 안전이나 인간의 건강은 전혀 위협하지 않는 비교적 경미한 질병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수지타산을 명분으로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땅에 파묻었다. 동물들은 고통 속에 죽어 갔고, 땅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그리고 오염된 땅에서는 공공연히 농사가 시작되었다. 세상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막되어 가고 있었다. (124)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전염병 만연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 신선한 바람과 맑은 물, 동물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본능에 따라 살 수 있는 농장, 답은 그 안에 있다. 동물의 행복이 곧 인간의 행복이 되고, 지구의 행복이 된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이치다. 어린 아이도 알 법한 이런 해결책을 우리 사회는 왜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까? 생산자의 수익 때문일까? 아니면 소비자가 누리는 혜택 때문일까? (168)
  • 살殺(죽일 살) + 처분處分(행정·사법 관청이 해당 법규를 적용하는 행위). 국민들에게 내려진 국가의 명령. 국가는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에 따라 예외 없이 파묻었다. 그곳에 죽음은 없었다. 다만 상품이 폐기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만 작동되고 있었을 뿐이다. (174)

묻다/문선희/책공장더불어 20190308 192쪽 13,000원

2010년 겨울에 발생한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347만 9,962마리의 가축과 648만 마리의 가금류가 땅에 파묻혔습니다. 그렇게 전국 4,799곳에 매몰지가 생겼습니다. 사진작가인 저자는 매몰지 4,799곳 중에서 100곳을 무작위로 골라 2년 동안 돌아다니며 기록했습니다.

"살처분 당시 구덩이에 내던져진 돼지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 보는 흙과 깨끗한 공기를 맡으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매몰된 땅은 심각하게 오염됐습니다. 살처분은 생명에 대한 배려는 아예 없고, 오로지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인간의 대량학살이었습니다.

묻다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땅에 왜 파묻었냐고 물을수록 사람답지 않아 슬픔과 수치만 묻어납니다.

함께한 세월

삼십여 년을 함께한 샤프

스탠드가 고장 나서 조명 가게를 찾았다. 찍어간 형광등 사진을 보여주자 진작에 이런 제품은 나오지 않는단다. LED만 취급한 지 오래됐다며 웃는다. 스탠드와 이십여 년을 함께했던 세월이 아쉬웠지만 결국 보내주었다.

이제는 삼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해 온 샤프만 남았다. 내가 소유한 것 중 가장 오래된 물건이다. 오래전 명함에서 잘라 붙였던 이름도 그 자리에 잘 붙어있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쌩쌩하다.

이름보다 오래된 -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

이름보다 오래된 -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
  •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수컷 노루에게는 뿔이, 수컷 고라니에게는 송곳니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만난 사슴에게는 뿔도 송곳니도 없었다. 아마도 암컷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암컷 노루와 고라니는 어떻게 구별하지? 겨우 찾아낸 힌트는 '노루궁뎅이 버섯'이었다. 하얗고 둥글고 보송보송한 모양이 노루 엉덩이를 닮았다고 했다. 황급히 달아나던 사슴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엉덩이에 그런 도드라지는 특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 노루가 아니라 암컷 고라니였을까? (54)
  • '고라니'라는 이름은 순우리말이다. '노루'도 순우리말인데, '노랗다'는 뜻이다. 고라니의 어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뿔 대신 송곳니가 있어서 '어금니', '송곳니'라는 의미로 고라니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고라니의 영문 이름은 'Water Deer'다. '물사슴'이라는 뜻의 이 예쁜 이름은 어느 영국인이 1870년에 중국에서 고라니를 처음 발견했을 때 물가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고 붙인 것이다. (...) 한국에서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로 분류되어 있다. 농작물 피해 때문에 매년 지자체별로 적지 않은 수의 고라니를 제거하고 있다니.... 야생동물이라 보호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더 놀라운 것은 호주에만 사는 캥거루나 코알라처럼, 고라니는 오직 한반도와 중국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우리의 '고유종'이자 '희귀 동물'이라는 사실이었다. (...) 국제적으로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고라니를 멸종위기종 적색 목록 '취약'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많아서 천덕꾸러기 신세인 고라니가 사자, 하마, 치타, 코알라와 비슷한 수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종이라니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59)
  •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 구제사업으로 3분마다 한 마리씩 총에 맞아 죽는다. 2014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3만 6,296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2018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1만 4,869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63)
  •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특정 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천적 때문이 아니라 같은 종 내부의 경쟁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어떤 종이든 개체수가 무한대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 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나 서식지 같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같은 종의 개체들은 필요한 자원이 겹치기 때문에 직접 맞부딪혀 싸운다. 그래서 고라니 같은 초식동물에게도 송곳니가 있는 것이다. (69)
  •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더 중요한 생명체라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생명체 간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것뿐이다. 그러나 자칭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주장이 인간 외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 모든 야생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산을 허물고 도시를 넓히고 도로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고라니의 생태는 존중되지 않는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도 오히려 불청객으로 내몰린다.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농작물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기를 바란다. 고라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나직한 물음이 가슴께에 밀려들었다. (70)
  • 그 겨울을 건너는 동안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92)
  •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안녕이었다. 부디 무사히 살아남기를,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이 초상 사진 작업은 존재 하나하나에 대한 나의 간절한 호명이자 정성 어린 기도였다. (106)
  • 끝끝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래서 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고라니들조차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사슴이겠지만, 모든 존재에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107)
  • 생태계에서 생명체들은 서로 얽히고 의지함으로써 모두를 지탱한다. 어떤 종을 멸종위기로 내모는 일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다. 모든 생명은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이미 존재하는 이상 누구도 구태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192)

이름보다 오래된/문선희/가망서사 20230728 196쪽 29,000원

10년간 200여 마리의 고라니를 만나 50여 점의 초상 사진을 완성했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지만 우리나라는 유해야생동물로 분류되어 3분마다 한 마리씩 총에 맞아 죽습니다. 2018년에 총에 맞아 죽은 고라니는 1만 4,869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웠지만 현상금으로 지급된 비용이 더 많았습니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도 오히려 불청객으로 내몰린다.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농작물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기를 바란다. 고라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고라니 몸짓은 인간보다 더 오래된 근원적인 몸짓입니다.

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 사회주의 여성단체 '빵과 장미 (Pan y Rosas)'는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을 선언하며 탄생했다. 이들은 여성 CEO의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피 말리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남성과 더 잘 '경쟁'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세계 최고 부자들 명단에 남성과 여성의 숫자가 동등해도 고용 불안과 저임금, 다양한 성차별적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삶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대통령 · 장관 · 기관장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도 다수 여성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이 체제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숱하게 경험했다. (6)
  • 빵과장미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이른바 이중체계론과 연관된 특정한 조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게는 전략이 결여돼 있다"는 1914년 루이스 니랜드(Louise Kneeland)의 진술을 채택한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할 수 없다는 시각이 이들의 출발점이다. (8)
  • 빵과장미는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볼리비아·브라질·칠레·멕시코·스페인 등에서도 활동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는 즉각적인 민주적 권리를 위해, 그리고 임신을 중지할 권리,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생활임금을 받을 권리, 폭행과 강간 및 학대를 피할 수 있는 권리 등 여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14)
  • 빵과장미 이름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런스에서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의 '빵과 장미 파업'에서 따왔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내건 요구가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노동자로서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아이를 기를 권리, 임신중지권, 길거리에서 괴롭힘당하지 않을 권리 등 여성으로서도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예술을 즐기고, 여행하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여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충만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빵을 위한 권리이며, 또한 장미를 위한 권리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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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장미의 도전/오연홍 엮음, 김요한, 양동민, 양준석, 오연홍, 전해성 역/숨쉬는책공장 20230227 236쪽 15,500원

빵과장미(Pan y Rosas)는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브라질·칠레 ·우루과이·볼리비아·멕시코·스페인·프랑스·미국·페루·독일·이탈리아·코스타리카·베네수엘라 여성들로 구성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국제단체입니다. 빵과장미라는 이름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런스에서 섬유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의 '빵과 장미 파업(The Lawrence Textile Strike)'에서 따왔습니다. 경제적 권리인 빵과 여성 권리인 장미를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잘 표현합니다.

빵과장미는 1914년 루이스 니랜드(Louise Kneeland)가 밝힌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게는 전략이 결여돼 있다.(The Socialist who is not a Feminist lacks breadth. The Feminist who is not a Socialist is lacking in strategy.)"는 견해를 공유합니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할 수 없다는 시각이 출발점입니다. 노동자계급 의제와 여성 의제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회주의란 현 상태 즉 "한 줌 소수가 터무니없이 큰 부를 챙겨가는 상태, 심지어 팬데믹을 겪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며 그 대가로 압도 다수가 점점 더 불안정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노동력 재생산은 냉혹하게 여성의 무급 노동에 내맡겨지는 그런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을 말합니다. 이런 착취체제를 끝장내는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여성해방의 토대를 확립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자본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 사회에 토대를 놓는 것만으로 충분히 여성 억압을 끝장낼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필수적인 한 걸음이라고 합니다.

빵과장미는 국제 선언문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과 함께한다. 이 투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사회주의혁명으로 안내하는 노동자계급의 반자본주의 혁명 강령이 필요하다."고 선언합니다. 이 주장과 행동을 적극 지지합니다. 왼쪽으로 강하게 이끄는 좌파의 생각이 상식이 되면 또 다른 좌파가 생기는 게 진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로노트 - 만화로 그린 치매일기

제로노트 - 만화로 그린 치매일기
  • 살면서 많은 일들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이한 일들을 허둥지둥 수습하며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급하게 밀고 들어오는 업무가 그렇고, 뜻밖의 사고가 그렇고, 만남과 헤어짐이 그렇고, 누군가의 부고가 그렇고, 내가 겪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다. (5)
  • 수학적으로 의미가 없었다가 무한한 존재로 의미를 탈바꿈한 '제로'처럼 아버지 역시도 기억이 사라져 원점으로 돌아오는 모습이지만, 만화의 형태로 기록하여 간직하고 읽히는 동안 무한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8)
  • 나와 다른 속도로 흘러가던 아버지의 시간은 당신의 생각이나 행동도 변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도 없이 아버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가는 것인지, 되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13)
  • 치매가 진행된 이후, 평소에 지니고 있던 습관이나 버릇이 더 견고해져서 난감한 경우가 참 많다. (27)
  • 수면 시간이 원래부터 길지 않았지만, 치매 이후로는 수면 패턴까지 불규칙해졌다. (63)
  • 잘 해오던 행동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더러 있다. 특별히 조건이나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늘 하던 행동이 갑작스럽게 바뀌게 되면 이유를 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96)
  • 참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117)
  •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토록 선명한데, 아버지는 조금씩 자신을 지우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속에서 아버지는 아직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듯하다. (119)
  • 치매 환자들의 고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계속 관찰해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고집과 망각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하다. 고집을 피우는 것인지, 정말 잊어버려서 그런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을 때가 난감하다. (144)
  •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지워진다는 게 무엇인지 눈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선 라면 끓이는 법이 지워졌고 가스불 켜는 벙이 지워졌고 전등 스위치 사용법이 지워졌고 지퍼 닫는 법이 지워졌고 옷 입는 법이 지워졌고 휴대폰 사용법이 지워졌고 TV 리모콘 사용법이 지워졌고 나도 지워질 것이다. (149)
  • 영화 〈테넷〉에서 인버전(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것)된 것처럼 치매 역시 시간이 거꾸로 간다. 우리는 아기에게 설명한 것이 통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는다. 치매 환자에게도 아기를 대하듯 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대화가 가능한 치매 노인을 마주하면 그 다짐은 자꾸만 잊힌다. 내 마음의 평정을 먼저 찾아야 한다. (194)
  • 고생하셨어요. 이제 쉬세요... (203)

제로노트/김범석/아침달 20221026 208쪽 16,000원

기억이 사라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기록한 치매일기입니다. 김범석 작가는 @zziziree로 활동하며 재치 있는 만평을 그립니다. 치매가 심해질수록 좌절은 더 커지므로 내 마음의 평정을 먼저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망설임 그리고 멍때리기

망설임

내가 작가로서 글쓰기에 근육이란 게 늘었다면 한 문장 한 문장 어렵게 이을 때 전전긍긍과 자문자답 그 과정에서 늘었구나 깨달았어요. AI 경우는 그 과정을 단축해 주는 걸로 유명한데, 전 그냥 제 분야에 한해서 말씀드리자면, 요새 지금 전쟁이 한창이잖아요. AI가 쓴 전쟁 문학, 난민 문학과 인간이 쓴 게 같을까? 소설이나 문학이 그저 콘텐츠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책 맨 앞으로 돌아가서 저자의 얼굴을 한참 보거나 양력을 보는 일이 있을까? 우리가 왜 윤동주나 이육사의 글을 보고 감동하지라는 질문으로 충분할 것 같고요.

고민되는 일이 있어서 (AI에게) 고민을 나눈 적이 있는데요. 인간한테는 있고 AI한테는 없는 게 하나 있었어요. 망설임이었는데요.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때 아픔을 들을 때 어떤 말을 삼키거나 주저하거나 짐작하고 헤아리는 찰나가 있더라고요. 그 주저 안에 힘겹게 서 있는 배려나 품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어느 때는 유려하고 빠른 AI의 조언보다 인간의 투박한 침묵이 위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소설가 김애란 작가가 AI와 인간의 다른 점에 대한 답이다. 인간의 망설임에는 배려와 품위가 숨어 있고, 때로는 투박한 침묵이 위로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인간에게는 있지만 AI에게는 없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멍때리기다. 멍때리는 시간은 오히려 삶을 채우는 중요한 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상상력이 생긴다.

망설임과 멍때리기, 이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다.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 작년 봄, 나는 나보다 50개월 어린 친구 어리를 딸로 입양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법적 가족이 됐다. 입양신고서를 접수하기 위해 방문한 읍사무소에서 가족관계등록 업무 담당자는 말했다. 해당 업무를 오래 했지만, 재혼가정도 아니고 게다가 나이 차이 얼마 안나는 성인 입양사례는 처음 본다고.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입양신고 일주년을 맞아 기념 여행을 다녀왔을 뿐 우리 삶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아침 함께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각자의 하루를 살며,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눈다. (5)
  • 나이도, 성격도 모두 다른 우리가 만나 즐겁게 살았던 경험은 '이런 형태의 가족을 구성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게 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의지하면서 따뜻하게. 성별과 나이를 떠나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의지하고 살면 가족 아닐까? 가족이 꼭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땐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이렇게 조립과 분해가 쉬운 가족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0)
  • 누군가는 귀농·귀촌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했다. 문화가 다른 낯선 곳으로 이민 가는 것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잘 정착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인 시골 생활은 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을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때론 어르신들의 과한 오지랖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133)
  • 어르신들은 시골에 젊은이들이 없다며 시골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시골살이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늘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팍팍한 도시에서의 삶 대신, 물질적으로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다른 속도로 살아볼 수 있는 시골에서의 삶을 원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시골살이를 망설이는 큰 이유는 '살 곳'과 '일할 거리', '또래 친구'다. 막상 마음을 먹더라도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고, 주저하는 것도 사실이다. (138)
  • 누군가와 함께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비슷한 식성'과 함께 '비슷한 위생관념'을 꼽는다. 만약 위생 관념이 많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면 습관과 성격이 상호보완적이거나,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오래 같이 살기 어려울지 모른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과 성격을 고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나와 어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건 그 간극이 아주 크지 않아 서로에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159)
  • 적당히 다정하고 적당히 가까운 사이. 남녀노소를 떠나 서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사이.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이. 그러면서도 의리를 지키는 사이. 비단 모녀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이든 친구 사이든 모든 관계에는 '아름다운 거리'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 거리를 지키며 살고 싶다. 너는 너, 나는 나, 서로에게 피해주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잘 사는 것,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관계 같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는 평온한 사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다. (206)
  • 내 가족은 부모, 아들, 딸 4인으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표본이었다. 이 허울뿐인 정상가족은 수십 년을 버티다 결국 허물어졌다. 정상가족의 환상 따윈 나에게 없다. 결혼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함께 사는 구성원 간에 예의와 의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가족을 갖고 싶었다. (212)
  • 어리와 즐거운 일, 슬픈 일을 함께하며 산 지 5년이 지나며 앞으로도 우리가 반려인으로 잘 살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한 우리는 법으로 묶인 가족이 되기로 했다. 법적 가족이 되기로 한 건 무엇보다 위급상황에서 서로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돼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그리고 누구 한 사람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먼 곳에 살며 어쩌다 한 번씩 보는 형제나 친척이 아닌 함께 사는 서로가 마지막을 정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길 마냥 기다리다가는 이대로 할머니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법이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법을 이용하지, 뭐. 세상을 상대로 싸우기보단 기존 틀 안에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227)
  • 어리와 법적 가족이 됐다고 해서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입양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이미 반려인으로 같이 살며 서로의 울타리가 돼주는 가족이었으니까. 다만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하나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심리적인 안정감. 만약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 많이 사라졌다. 일단 어느 날 갑자기 한 명이 크게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됐을 때 바로 법적 보호자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안심된다. 그리고 둘이 살다가 나중에 누구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일상 생활을 함께했던 서로가 유가족의 자격으로 마무리해줄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놓인다. (237)
  • 성인 입양은 입양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다음 날 바로 가족이 될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구속력 있으면서 모든 행위에서 법적 권리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부모자식 사이가 되는 것이 이렇게 쉽다는 게. 입양은 이렇게 쉬운데 다양한 가족을 품어줄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 제정은 왜 그리 어렵기만 한 건지, 참으로 모를일이다. (242)

친구를 입양했습니다/은서란/위즈덤하우스 20230705 256쪽 16,000원

50개월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모녀지간이 됐습니다. 이상한 정상가족보다는 비정상가족에 가깝지만 조립식 분자가족에 비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습니다. 조립과 분해가 쉬운 느슨한 가족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프랑스에는 가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팍스라는 제도가 있지만, 우린 아직 없습니다.

성인 입양은 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되는데 생활동반자법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아직 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형태의 가족을 만들 권리는 우리에게 있는데 말이죠.

樂書 4월

4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닙니다. 4월은 가장 잠오는 달입니다.

4월 1일
오늘은 만우절이기도 하고요, 멸종위기종의 날이랍니다. 진짭니다.

4월 4일
死月死日입니다. 오늘은 내란수괴 파면 1주년입니다. 그날 모든 이에게 빚졌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이 작년 오늘 내란수괴가 파면됐다는 걸 잊었더군요. 바쁘시겠지만, 잊지 말고 옹골차게 진보하자고요. 기념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낮술, 낫술, 나 술 합니다. 찬란하고 위대한 그대들을 위해 건배, 합니다.

4월 16일
세월호참사 12주기
열두 번째 봄,
기억은
멈추지 않습니다

압도적 내란종식과 압축적 역적청산
내란진압 처음은 수괴를 공개처형하는 거고요, 마지막은 국짐해체지요. 역적청산의 마침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로 부르는 겁니다. 아울러 새 시대는 화폐 앞면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열사, 뒷면은 한반도 멸종위기종을 담아야 합니다.

쓰봉
그 많던 쓰봉은 누가 다 입었을까...

꽃구경
손만 잡고 연애하기는 가을이 제일 좋고요, 지금은 핑계 김에 꽃구경하기 좋은 시절입니다. 여수 영취산이나 강화도 고려산으로 진달래 보러 가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사찰 밑에 있는 닭백숙집이 맛, 있습디다.

호르무즈 해협
국제법과 관습법으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행세를 받는 걸 비판하기 전에 또라이 트럼프이스라엘을 먼저 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란은 통행세를 받아서 꼭 좋은 곳에 잘 쓰시라. 아울러 이 전쟁은 미국·이스라엘 이란 침공이라고 해야 합니다.

스마트폰과 꼰대
스마트폰을 쓰면서 백업하지 않는 꼰대들이 주변에 상당히 많데요. 폰을 바꾸면서 구폰에 있던 데이터를 옮길 생각하며 갑갑해하더군요. 대부분 대리점 방문해서 맡깁디다. 백업하지 않았으니, 손과 발이 고생하셔야지요. 이런 꼰대들은 지도 앱을 보고 찾아오면 되는데, 다 와서 못 찾겠다고 전화합디다. 환장합니다.

워킹데드
미드는 시즌제로 만들어서 잊을 만하면 새 시즌을 선보여서 지난 시즌을 복습하지요. 요게 제작자로서는 득이지만, 머리 나쁘고 성질 급한 시청자는 환장한답니다. 《워킹데드》 전 시즌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는 얘깁니다. 캐롤과 함께 시즌 마지막쯤에 등장한 주디스가 성장하면서 펼칠 활약에 기대가 컸습니다만, 후다닥 마무리되는 바람에 정말 아쉽습니다.

옛날 극장
옛날 극장은 중간에 들어가 영화를 본 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내가 본 부분까지 보고 나왔지요. 요거 없어지니 이제는 영화를 중간부터 볼 엄두조차 들지 않더라고요. 진화인가요, 퇴화인가요...

홀로그램
홀로 몸무게 재며 그램 단위로 변한 걸 확인함

JAGUAR KIM
미국 사람들아, 이스라엘 사람들아, 잘 찾아보면 JAGUAR KIM이라고 있을 겁니다.

휴민트
조국이 분단된 것도 서러운데 식사 인심까지 갈라서야 되갔습니까.

사악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관한 책을 추천합니다.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강탈국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산업》, 《팔레스타인 실험실》. 그리고 조 사코(Joe Sacco)가 쓴 논픽션 만화 《팔레스타인》(휴머니스트, 2025). 권말에 박현도 교수가 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역사와 해법〉은 짧지만, 일독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시방 눈으로 목격하고 있지만, 홀로코스트를 앞세운 이스라엘은 보이는 것보다 더 사악합니다.

안세영
안세영, 2026 아시아배드민턴선수권대회 우승!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2023 세계선수권, 2024 파리 올림픽 제패.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혁명
이것이 혁명인지 아닌지는 권력을 잡은 집단이 토지 분배를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렸지 싶다. 역사가 그렇습디다.

늑구
늑구는 350제곱킬로미터의 활동 영역을 찾든지, 늑근으로 개명하고 한 인간을 가축화시켜 광역시 반려견 시조가 됐으면 싶다. 대전 오월드에서 탈출했던 늑구가 열흘 만에 귀환했다고 한다.

성난 사람들 시즌2 후기
초호화 출연자들에 속았다는 성난 사람 둘

아직 멀었다
"자본가가 거리시위하고 파업하는 꼴을 보고 싶다. 내가 이렇게 소박하다." 작년 유월에 썼던 글이다. 노란봉투법 이후 노동자가 숨졌다. 경찰은 사고를 유발했다. 노동부는 절차적 문제를 지적한다. 야밤에도 X에 글을 올리던 소년공 출신 대통령은 쌩까고 있다. 아직 멀었다.

성과급
뽄드 만드는 풀러(H.B.FULLER)라는 회사 사명은 "풀러는 고객, 직원, 주주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해 그 중요성을 그 순서대로 인식하고 회사의 책임을 다한다."라고 합니다. K-재벌은 직원에 협력업체도 낑궈 주든가, 지역사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든가 했으면 싶네요. 반도체 회사 억대 성과급에 배가 아픈 이들이 많나 보네요. 원래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종족이었습니다. 단, 배만 아프지 달라고 구걸하거나 강제로 뺏지는 않았지요.

나인, 외계인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나인
네가 듣고 있는 이상한 소리, 그거 식물이 대화하는 소리야. 그게 들리는 건 너도 식물이라서야.

어느 날 식물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인에게 들렸습니다. 나인은 지모와 함께 삽니다. 지모는 이름이 유지인데 유지 이모라고 부르다 '지 이모'로 줄였다가 '지모'로 부르게 됐습니다. 나인은 며칠 전부터 식물들의 소리가 들렸고, 손가락에서 새싹이 자랐습니다. 나인은 지모 손끝에서 자란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인이 됐습니다. 나인과 지모는 지구에서 몇백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외계인 누브족입니다.

지모는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이 외계인이라고 알려줍니다. 외부인이니까 인간들이 정해 둔 규칙을 지키며 정체를 들키지 않고 꽁꽁 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점이 지대가 있습니다. 점이 지대는 죗값을 무를 수 있는 유효 기간, 즉 죄책감이 유효한 마지막 기간 같은 겁니다. 죄책감의 유효 기간이 지나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신미래와 강현주는 유나인과 비밀이 없는 절친입니다. 나인은 이 년 전에 가출한 박원우 선배의 사연을 알게 됐습니다. 박원우가 죽어 묻혀 있는 땅에 뿌리내린 기억을 가진 식물이 나인에게 알려줬습니다. 세 친구는 점이 지대에 서 있는 범인을 잡아 경계를 넘어가는 걸 막으려고 합니다.

어느 북토크 자리에서 천선란 작가는 외계인이 있냐는 물음에 "외계인 혹은 인간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싹은 자라고 있는데 인간이 너무 빨리 태어나 8억 년 뒤에는 나타날지 모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미스테리하게 사라진 지모를 중심으로 나인2 집필 제의가 있었지만, 당장은 계획이 없다며 집필이 끝나고 출판하면 등장인물은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손서은 작가는 누군가 쓰러지면 무조건 119에 전화하라는 가장 현실적인 답을 알려줍니다.

신호등 초록불이 삼초 정도 남았는데 뛰지 않고 멈추는 사람, 길가에 핀 꽃을 찍으려고 땅에 누워 버리는 사람, 아이와 강아지에게 친절한 사람은 외계인일지도 모릅니다. 나인은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이 되는 죽은 땅에 식물을 살리는 아홉 번째 싹,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나인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나인/천선란/창비 20211105 392쪽 14,000원


덧. 오탈자(?)
237쪽 8행 파일을 듣고 종렬의 옆에 → 파일을 듣고 있던 종렬의 옆에 혹은 파일을 종렬의 옆에

무어래요

복사꽃

한길로만 오시다
한고개 넘어 우리집.
앞문으로 오시지는 말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늦은 봄날
복사꽃 연분홍 이슬비가 나리시거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바람 피해 오시는 이처럼 들레시면
누가 무어래요?

- 정지용, 〈무어래요〉, (朝鮮之光 64號, 1927)

가녀장의 시대

가녀장의 시대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부장이었고, 여자 어른들은 집안일을 했고 남자 어른들은 바깥일을 했습니다. 엄마는 이름 없이 불리며 살림하는 자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슬아는 글을 썼고, 성공한 애로 불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는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이슬아는 스물두 살에 작가로 데뷔하며 마감의 힘으로 글을 쓰며 가녀장이 됐습니다. 오른팔에는 청소기를 왼팔에는 대걸레를 새긴 아버지 웅이와 살림노동으로 월급을 받는 어머니 복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슬아와 웅이와 복희가 바깥에서 밥을 사 먹는다면 가족 외식인지 직원 회식인지 모르지만, 모부는 슬아가 만든 출판사 직원이 됐고 슬아는 이 집안의 바깥양반이 됐습니다.

낮잠 자는 걸 좋아하고 출판이든 문학이든 낮잠을 자가면서 해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낮잠 출판사를 설립한 건 삼 년 전이었습니다. 슬아는 돈, 재미, 의미, 의무, 아름다움 중 최소한 두 가지를 충족하는 일만 수락합니다. 슬아는 노브라로 방송에 출연했다가 잘리기도 했습니다. 더우면 등목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콩나물국밥집에서 계산하며 중년의 여자 종업원에게 "선생님,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할아버지라는 가부장과 함께 살던 시절, 슬아에게 제사란 등짝과 엉덩이와 해진 양말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제사는 며느리의 노동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가녀장이 통치하는 집안에서 제사는 없습니다. 슬아는 말합니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슬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이것은 제가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라며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빠들의 시대를 지나, 권위를 쥐어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같이 바랍니다.

가녀장은 스스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며 투쟁하며 아주 조금 쟁취한 것입니다. 한여름에 겨털 휘날리며 등목하는 가녀장이 수두룩하길 앙망합니다.

가녀장의 시대/이슬아/이야기장수 20221007 316쪽 15,000원

안개

안개

동틀 무렵이지만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김승옥은 무진의 명산물이 안개라고 했다. 아름다운 문학 속 명산물이라도 현실에서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노동 현장에서는 안개가 치명적이다. 시야를 흐리게 만들어 작업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명산물이라 해도, 노동 현장에선 속히 걷혀야 한다. 건설 노동자들 발소리가 하나둘 들리면 안개는 패퇴하는 적군들처럼 물러갈 것이다.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
  • 사람들은 흔히 '지방 재생'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농산촌의 관계를 도시의 물자(돈, 사람)를 경제적 혜택을 그리 받지 못하는 농산촌에 전달한다는 식으로 연상하고 그 의미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농산촌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이 아닐뿐더러 그런 방식으로는 도시 기업과의 관계 역시 지속되기 어렵다. (48)
  • 컨설팅 회사뿐만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이나 NPO, NGO 그리고 행정기관까지, 계획이나 전략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열심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만 할 뿐 정작 위험을 떠안는 것은 언제나 지역이었다. (52)
  • 창업이란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밀려드는 고객들의 절실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지역은 동반 달리기를 원하고 있다"는 내 가설을 실증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지역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동반 달리기'를 해줄 파트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59)
  • 나는 지금까지 NPO나 컨설턴트로서 지역 일을 해왔지만 어디까지나 흑자를 만들어 그 마을을 지탱하도록 돕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역할 설정은 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장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업 주체가 된다고 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자 굳건하던 마음속 '장벽'이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123)
  •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라는 사업 전체 콘셉트는 내가 정했다. 다만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가(제공 가치), 그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고객에게 전달할 것인가(타깃) 하는 문제는 실제로 고객과 접하는 매니저나 직원과 함께 고민해갈 생각이었다. (134)
  • 마을에 점점이 있는 빈집을 호텔로 만드는 데서 나아가 빈집 이외의 자원을 호텔 기능의 일부로 활용해 인구 700명의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을 논두렁길이나 도로를 호텔 복도로 기능하게 하고 휴게소를 라운지로, 고스게 온천을 목욕탕으로, 마을 상점을 특산물 판매점으로, 그리고 마을 주민은 지배인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마을 전체가 호텔로서 존재하는 가치관을 구축하다 보면 마을의 매력을 호텔에 녹여내 지역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149)
  • 전체 마을 주민에게 알리기 전에 노년층에 먼저 설명한 효과는 매우 컸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어떻게든 좋게 만들어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열정으로 노년층이 이 사업을 주위에 널리 알리면서 마을 전체가 우리 사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58)
  • '계획'→'자금'→'인재'에서 '인재'→'자금'→'계획'으로, 말 그대로 정반대 순서로의 전환은 큰 결단이었다. 다만 이러한 결정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다양한 지역과 '동반 달리기'를 해오면서 지역 실정을 체감으로 터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0년 후를 내다보며 새로운 방향성을 그려냈지만, 이 작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브랜딩의 사다리를 하나 올라왔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새로운 사다리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불안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217)
  • 사토유메를 처음 시작했을 때 많은 지역에서 우리가 내세운 '동반 달리기'나 '고향의 꿈을 현실로'라는 이념에 공감해 실적도 없는 우리에게 지역의 미래가 걸린 일을 맡겨 주었다. 나와 더불어 일하는 직원들 역시 '사토유메답다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마을의 미래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은 고향을 미래로 이끌어가려는 '의지'이며, 성실하고 투박하게 지역과 계속 마주해 가는 '삶의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52)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시마다 슌페이嶋田俊平/김범수 역/황소자리 20230306 258쪽 18,500원

정책을 제안하고 보고서만 납품하던 컨설턴트가 직접 회사를 만들어 700여 명이 사는 마을을 되살리고 소멸 위기를 극복한 활동 보고서입니다. 계획한 정책의 성공 여부는 뒷전이었다가 몸소 지방 재생을 위한 '동반 달리기형' 회사를 만들고, 자금과 인재를 끌어모아 지속 가능한 모델을 넓히고 있습니다. 공공사업으로 시골에 시설이나 건물만 만드는 '하코모노 행정(세금을 낭비하는 전시행정)'이 되지 않는 힌트를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