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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 사회주의 여성단체 '빵과 장미 (Pan y Rosas)'는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을 선언하며 탄생했다. 이들은 여성 CEO의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피 말리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남성과 더 잘 '경쟁'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세계 최고 부자들 명단에 남성과 여성의 숫자가 동등해도 고용 불안과 저임금, 다양한 성차별적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삶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대통령 · 장관 · 기관장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도 다수 여성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이 체제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숱하게 경험했다. (6)
  • 빵과장미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이른바 이중체계론과 연관된 특정한 조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게는 전략이 결여돼 있다"는 1914년 루이스 니랜드(Louise Kneeland)의 진술을 채택한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할 수 없다는 시각이 이들의 출발점이다. (8)
  • 빵과장미는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볼리비아·브라질·칠레·멕시코·스페인 등에서도 활동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는 즉각적인 민주적 권리를 위해, 그리고 임신을 중지할 권리,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생활임금을 받을 권리, 폭행과 강간 및 학대를 피할 수 있는 권리 등 여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14)
  • 빵과장미 이름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런스에서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의 '빵과 장미 파업'에서 따왔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내건 요구가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노동자로서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아이를 기를 권리, 임신중지권, 길거리에서 괴롭힘당하지 않을 권리 등 여성으로서도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예술을 즐기고, 여행하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여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충만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빵을 위한 권리이며, 또한 장미를 위한 권리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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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장미의 도전/오연홍 엮음, 김요한, 양동민, 양준석, 오연홍, 전해성 역/숨쉬는책공장 20230227 236쪽 15,500원

빵과장미(Pan y Rosas)는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브라질·칠레 ·우루과이·볼리비아·멕시코·스페인·프랑스·미국·페루·독일·이탈리아·코스타리카·베네수엘라 여성들로 구성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국제단체입니다. 빵과장미라는 이름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런스에서 섬유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의 '빵과 장미 파업(The Lawrence Textile Strike)'에서 따왔습니다. 경제적 권리인 빵과 여성 권리인 장미를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잘 표현합니다.

빵과장미는 1914년 루이스 니랜드(Louise Kneeland)가 밝힌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게는 전략이 결여돼 있다.(The Socialist who is not a Feminist lacks breadth. The Feminist who is not a Socialist is lacking in strategy.)"는 견해를 공유합니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할 수 없다는 시각이 출발점입니다. 노동자계급 의제와 여성 의제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회주의란 현 상태 즉 "한 줌 소수가 터무니없이 큰 부를 챙겨가는 상태, 심지어 팬데믹을 겪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며 그 대가로 압도 다수가 점점 더 불안정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노동력 재생산은 냉혹하게 여성의 무급 노동에 내맡겨지는 그런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을 말합니다. 이런 착취체제를 끝장내는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여성해방의 토대를 확립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자본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 사회에 토대를 놓는 것만으로 충분히 여성 억압을 끝장낼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필수적인 한 걸음이라고 합니다.

빵과장미는 국제 선언문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과 함께한다. 이 투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사회주의혁명으로 안내하는 노동자계급의 반자본주의 혁명 강령이 필요하다."고 선언합니다. 이 주장과 행동을 적극 지지합니다. 왼쪽으로 강하게 이끄는 좌파의 생각이 상식이 되면 또 다른 좌파가 생기는 게 진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로노트 - 만화로 그린 치매일기

제로노트 - 만화로 그린 치매일기
  • 살면서 많은 일들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이한 일들을 허둥지둥 수습하며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급하게 밀고 들어오는 업무가 그렇고, 뜻밖의 사고가 그렇고, 만남과 헤어짐이 그렇고, 누군가의 부고가 그렇고, 내가 겪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다. (5)
  • 수학적으로 의미가 없었다가 무한한 존재로 의미를 탈바꿈한 '제로'처럼 아버지 역시도 기억이 사라져 원점으로 돌아오는 모습이지만, 만화의 형태로 기록하여 간직하고 읽히는 동안 무한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8)
  • 나와 다른 속도로 흘러가던 아버지의 시간은 당신의 생각이나 행동도 변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도 없이 아버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가는 것인지, 되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13)
  • 치매가 진행된 이후, 평소에 지니고 있던 습관이나 버릇이 더 견고해져서 난감한 경우가 참 많다. (27)
  • 수면 시간이 원래부터 길지 않았지만, 치매 이후로는 수면 패턴까지 불규칙해졌다. (63)
  • 잘 해오던 행동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더러 있다. 특별히 조건이나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늘 하던 행동이 갑작스럽게 바뀌게 되면 이유를 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96)
  • 참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117)
  •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토록 선명한데, 아버지는 조금씩 자신을 지우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속에서 아버지는 아직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듯하다. (119)
  • 치매 환자들의 고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계속 관찰해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고집과 망각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하다. 고집을 피우는 것인지, 정말 잊어버려서 그런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을 때가 난감하다. (144)
  •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지워진다는 게 무엇인지 눈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선 라면 끓이는 법이 지워졌고 가스불 켜는 벙이 지워졌고 전등 스위치 사용법이 지워졌고 지퍼 닫는 법이 지워졌고 옷 입는 법이 지워졌고 휴대폰 사용법이 지워졌고 TV 리모콘 사용법이 지워졌고 나도 지워질 것이다. (149)
  • 영화 〈테넷〉에서 인버전(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것)된 것처럼 치매 역시 시간이 거꾸로 간다. 우리는 아기에게 설명한 것이 통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는다. 치매 환자에게도 아기를 대하듯 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대화가 가능한 치매 노인을 마주하면 그 다짐은 자꾸만 잊힌다. 내 마음의 평정을 먼저 찾아야 한다. (194)
  • 고생하셨어요. 이제 쉬세요... (203)

제로노트/김범석/아침달 20221026 208쪽 16,000원

기억이 사라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기록한 치매일기입니다. 김범석 작가는 @zziziree로 활동하며 재치 있는 만평을 그립니다. 치매가 심해질수록 좌절은 더 커지므로 내 마음의 평정을 먼저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망설임 그리고 멍때리기

망설임

내가 작가로서 글쓰기에 근육이란 게 늘었다면 한 문장 한 문장 어렵게 이을 때 전전긍긍과 자문자답 그 과정에서 늘었구나 깨달았어요. AI 경우는 그 과정을 단축해 주는 걸로 유명한데, 전 그냥 제 분야에 한해서 말씀드리자면, 요새 지금 전쟁이 한창이잖아요. AI가 쓴 전쟁 문학, 난민 문학과 인간이 쓴 게 같을까? 소설이나 문학이 그저 콘텐츠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책 맨 앞으로 돌아가서 저자의 얼굴을 한참 보거나 양력을 보는 일이 있을까? 우리가 왜 윤동주나 이육사의 글을 보고 감동하지라는 질문으로 충분할 것 같고요.

고민되는 일이 있어서 (AI에게) 고민을 나눈 적이 있는데요. 인간한테는 있고 AI한테는 없는 게 하나 있었어요. 망설임이었는데요.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때 아픔을 들을 때 어떤 말을 삼키거나 주저하거나 짐작하고 헤아리는 찰나가 있더라고요. 그 주저 안에 힘겹게 서 있는 배려나 품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어느 때는 유려하고 빠른 AI의 조언보다 인간의 투박한 침묵이 위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소설가 김애란 작가가 AI와 인간의 다른 점에 대한 답이다. 인간의 망설임에는 배려와 품위가 숨어 있고, 때로는 투박한 침묵이 위로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인간에게는 있지만 AI에게는 없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멍때리기다. 멍때리는 시간은 오히려 삶을 채우는 중요한 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상상력이 생긴다.

망설임과 멍때리기, 이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다.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 작년 봄, 나는 나보다 50개월 어린 친구 어리를 딸로 입양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법적 가족이 됐다. 입양신고서를 접수하기 위해 방문한 읍사무소에서 가족관계등록 업무 담당자는 말했다. 해당 업무를 오래 했지만, 재혼가정도 아니고 게다가 나이 차이 얼마 안나는 성인 입양사례는 처음 본다고.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입양신고 일주년을 맞아 기념 여행을 다녀왔을 뿐 우리 삶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아침 함께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각자의 하루를 살며,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눈다. (5)
  • 나이도, 성격도 모두 다른 우리가 만나 즐겁게 살았던 경험은 '이런 형태의 가족을 구성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게 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의지하면서 따뜻하게. 성별과 나이를 떠나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의지하고 살면 가족 아닐까? 가족이 꼭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땐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이렇게 조립과 분해가 쉬운 가족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0)
  • 누군가는 귀농·귀촌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했다. 문화가 다른 낯선 곳으로 이민 가는 것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잘 정착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인 시골 생활은 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을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때론 어르신들의 과한 오지랖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133)
  • 어르신들은 시골에 젊은이들이 없다며 시골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시골살이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늘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팍팍한 도시에서의 삶 대신, 물질적으로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다른 속도로 살아볼 수 있는 시골에서의 삶을 원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시골살이를 망설이는 큰 이유는 '살 곳'과 '일할 거리', '또래 친구'다. 막상 마음을 먹더라도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고, 주저하는 것도 사실이다. (138)
  • 누군가와 함께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비슷한 식성'과 함께 '비슷한 위생관념'을 꼽는다. 만약 위생 관념이 많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면 습관과 성격이 상호보완적이거나,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오래 같이 살기 어려울지 모른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과 성격을 고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나와 어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건 그 간극이 아주 크지 않아 서로에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159)
  • 적당히 다정하고 적당히 가까운 사이. 남녀노소를 떠나 서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사이.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이. 그러면서도 의리를 지키는 사이. 비단 모녀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이든 친구 사이든 모든 관계에는 '아름다운 거리'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 거리를 지키며 살고 싶다. 너는 너, 나는 나, 서로에게 피해주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잘 사는 것,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관계 같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는 평온한 사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다. (206)
  • 내 가족은 부모, 아들, 딸 4인으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표본이었다. 이 허울뿐인 정상가족은 수십 년을 버티다 결국 허물어졌다. 정상가족의 환상 따윈 나에게 없다. 결혼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함께 사는 구성원 간에 예의와 의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가족을 갖고 싶었다. (212)
  • 어리와 즐거운 일, 슬픈 일을 함께하며 산 지 5년이 지나며 앞으로도 우리가 반려인으로 잘 살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한 우리는 법으로 묶인 가족이 되기로 했다. 법적 가족이 되기로 한 건 무엇보다 위급상황에서 서로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돼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그리고 누구 한 사람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먼 곳에 살며 어쩌다 한 번씩 보는 형제나 친척이 아닌 함께 사는 서로가 마지막을 정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길 마냥 기다리다가는 이대로 할머니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법이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법을 이용하지, 뭐. 세상을 상대로 싸우기보단 기존 틀 안에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227)
  • 어리와 법적 가족이 됐다고 해서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입양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이미 반려인으로 같이 살며 서로의 울타리가 돼주는 가족이었으니까. 다만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하나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심리적인 안정감. 만약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 많이 사라졌다. 일단 어느 날 갑자기 한 명이 크게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됐을 때 바로 법적 보호자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안심된다. 그리고 둘이 살다가 나중에 누구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일상 생활을 함께했던 서로가 유가족의 자격으로 마무리해줄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놓인다. (237)
  • 성인 입양은 입양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다음 날 바로 가족이 될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구속력 있으면서 모든 행위에서 법적 권리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부모자식 사이가 되는 것이 이렇게 쉽다는 게. 입양은 이렇게 쉬운데 다양한 가족을 품어줄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 제정은 왜 그리 어렵기만 한 건지, 참으로 모를일이다. (242)

친구를 입양했습니다/은서란/위즈덤하우스 20230705 256쪽 16,000원

50개월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모녀지간이 됐습니다. 이상한 정상가족보다는 비정상가족에 가깝지만 조립식 분자가족에 비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습니다. 조립과 분해가 쉬운 느슨한 가족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프랑스에는 가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팍스라는 제도가 있지만, 우린 아직 없습니다.

성인 입양은 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되는데 생활동반자법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아직 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형태의 가족을 만들 권리는 우리에게 있는데 말이죠.

樂書 4월

4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닙니다. 4월은 가장 잠오는 달입니다.

4월 1일
오늘은 만우절이기도 하고요, 멸종위기종의 날이랍니다. 진짭니다.

4월 4일
死月死日입니다. 오늘은 내란수괴 파면 1주년입니다. 그날 모든 이에게 빚졌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이 작년 오늘 내란수괴가 파면됐다는 걸 잊었더군요. 바쁘시겠지만, 잊지 말고 옹골차게 진보하자고요. 기념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낮술, 낫술, 나 술 합니다. 찬란하고 위대한 그대들을 위해 건배, 합니다.

4월 16일
세월호참사 12주기
열두 번째 봄,
기억은
멈추지 않습니다

압도적 내란종식과 압축적 역적청산
내란진압 처음은 수괴를 공개처형하는 거고요, 마지막은 국짐해체지요. 역적청산의 마침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로 부르는 겁니다. 아울러 새 시대는 화폐 앞면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열사, 뒷면은 한반도 멸종위기종을 담아야 합니다.

쓰봉
그 많던 쓰봉은 누가 다 입었을까...

꽃구경
손만 잡고 연애하기는 가을이 제일 좋고요, 지금은 핑계 김에 꽃구경하기 좋은 시절입니다. 여수 영취산이나 강화도 고려산으로 진달래 보러 가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사찰 밑에 있는 닭백숙집이 맛, 있습디다.

호르무즈 해협
국제법과 관습법으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행세를 받는 걸 비판하기 전에 또라이 트럼프이스라엘을 먼저 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란은 통행세를 받아서 꼭 좋은 곳에 잘 쓰시라. 아울러 이 전쟁은 미국·이스라엘 이란 침공이라고 해야 합니다.

스마트폰과 꼰대
스마트폰을 쓰면서 백업하지 않는 꼰대들이 주변에 상당히 많데요. 폰을 바꾸면서 구폰에 있던 데이터를 옮길 생각하며 갑갑해하더군요. 대부분 대리점 방문해서 맡깁디다. 백업하지 않았으니, 손과 발이 고생하셔야지요. 이런 꼰대들은 지도 앱을 보고 찾아오면 되는데, 다 와서 못 찾겠다고 전화합디다. 환장합니다.

워킹데드
미드는 시즌제로 만들어서 잊을 만하면 새 시즌을 선보여서 지난 시즌을 복습하지요. 요게 제작자로서는 득이지만, 머리 나쁘고 성질 급한 시청자는 환장한답니다. 《워킹데드》 전 시즌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는 얘깁니다. 캐롤과 함께 시즌 마지막쯤에 등장한 주디스가 성장하면서 펼칠 활약에 기대가 컸습니다만, 후다닥 마무리되는 바람에 정말 아쉽습니다.

옛날 극장
옛날 극장은 중간에 들어가 영화를 본 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내가 본 부분까지 보고 나왔지요. 요거 없어지니 이제는 영화를 중간부터 볼 엄두조차 들지 않더라고요. 진화인가요, 퇴화인가요...

홀로그램
홀로 몸무게 재며 그램 단위로 변한 걸 확인함

JAGUAR KIM
미국 사람들아, 이스라엘 사람들아, 잘 찾아보면 JAGUAR KIM이라고 있을 겁니다.

휴민트
조국이 분단된 것도 서러운데 식사 인심까지 갈라서야 되갔습니까.

사악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관한 책을 추천합니다.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강탈국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산업》, 《팔레스타인 실험실》. 그리고 조 사코(Joe Sacco)가 쓴 논픽션 만화 《팔레스타인》(휴머니스트, 2025). 권말에 박현도 교수가 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역사와 해법〉은 짧지만, 일독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시방 눈으로 목격하고 있지만, 홀로코스트를 앞세운 이스라엘은 보이는 것보다 더 사악합니다.

안세영
안세영, 2026 아시아배드민턴선수권대회 우승!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2023 세계선수권, 2024 파리 올림픽 제패.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혁명
이것이 혁명인지 아닌지는 권력을 잡은 집단이 토지 분배를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렸지 싶다. 역사가 그렇습디다.

늑구
늑구는 350제곱킬로미터의 활동 영역을 찾든지, 늑근으로 개명하고 한 인간을 가축화시켜 광역시 반려견 시조가 됐으면 싶다. 대전 오월드에서 탈출했던 늑구가 열흘 만에 귀환했다고 한다.

성난 사람들 시즌2 후기
초호화 출연자들에 속았다는 성난 사람 둘

아직 멀었다
"자본가가 거리시위하고 파업하는 꼴을 보고 싶다. 내가 이렇게 소박하다." 작년 유월에 썼던 글이다. 노란봉투법 이후 노동자가 숨졌다. 경찰은 사고를 유발했다. 노동부는 절차적 문제를 지적한다. 야밤에도 X에 글을 올리던 소년공 출신 대통령은 쌩까고 있다. 아직 멀었다.

성과급
뽄드 만드는 풀러(H.B.FULLER)라는 회사 사명은 "풀러는 고객, 직원, 주주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해 그 중요성을 그 순서대로 인식하고 회사의 책임을 다한다."라고 합니다. K-재벌은 직원에 협력업체도 낑궈 주든가, 지역사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든가 했으면 싶네요. 반도체 회사 억대 성과급에 배가 아픈 이들이 많나 보네요. 원래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종족이었습니다. 단, 배만 아프지 달라고 구걸하거나 강제로 뺏지는 않았지요.

나인, 외계인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나인
네가 듣고 있는 이상한 소리, 그거 식물이 대화하는 소리야. 그게 들리는 건 너도 식물이라서야.

어느 날 식물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인에게 들렸습니다. 나인은 지모와 함께 삽니다. 지모는 이름이 유지인데 유지 이모라고 부르다 '지 이모'로 줄였다가 '지모'로 부르게 됐습니다. 나인은 며칠 전부터 식물들의 소리가 들렸고, 손가락에서 새싹이 자랐습니다. 나인은 지모 손끝에서 자란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인이 됐습니다. 나인과 지모는 지구에서 몇백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외계인 누브족입니다.

지모는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이 외계인이라고 알려줍니다. 외부인이니까 인간들이 정해 둔 규칙을 지키며 정체를 들키지 않고 꽁꽁 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점이 지대가 있습니다. 점이 지대는 죗값을 무를 수 있는 유효 기간, 즉 죄책감이 유효한 마지막 기간 같은 겁니다. 죄책감의 유효 기간이 지나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신미래와 강현주는 유나인과 비밀이 없는 절친입니다. 나인은 이 년 전에 가출한 박원우 선배의 사연을 알게 됐습니다. 박원우가 죽어 묻혀 있는 땅에 뿌리내린 기억을 가진 식물이 나인에게 알려줬습니다. 세 친구는 점이 지대에 서 있는 범인을 잡아 경계를 넘어가는 걸 막으려고 합니다.

어느 북토크 자리에서 천선란 작가는 외계인이 있냐는 물음에 "외계인 혹은 인간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싹은 자라고 있는데 인간이 너무 빨리 태어나 8억 년 뒤에는 나타날지 모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미스테리하게 사라진 지모를 중심으로 나인2 집필 제의가 있었지만, 당장은 계획이 없다며 집필이 끝나고 출판하면 등장인물은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손서은 작가는 누군가 쓰러지면 무조건 119에 전화하라는 가장 현실적인 답을 알려줍니다.

신호등 초록불이 삼초 정도 남았는데 뛰지 않고 멈추는 사람, 길가에 핀 꽃을 찍으려고 땅에 누워 버리는 사람, 아이와 강아지에게 친절한 사람은 외계인일지도 모릅니다. 나인은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이 되는 죽은 땅에 식물을 살리는 아홉 번째 싹,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나인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나인/천선란/창비 20211105 392쪽 14,000원


덧. 오탈자(?)
237쪽 8행 파일을 듣고 종렬의 옆에 → 파일을 듣고 있던 종렬의 옆에 혹은 파일을 종렬의 옆에

무어래요

복사꽃

한길로만 오시다
한고개 넘어 우리집.
앞문으로 오시지는 말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늦은 봄날
복사꽃 연분홍 이슬비가 나리시거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바람 피해 오시는 이처럼 들레시면
누가 무어래요?

- 정지용, 〈무어래요〉, (朝鮮之光 64號, 1927)

가녀장의 시대

가녀장의 시대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부장이었고, 여자 어른들은 집안일을 했고 남자 어른들은 바깥일을 했습니다. 엄마는 이름 없이 불리며 살림하는 자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슬아는 글을 썼고, 성공한 애로 불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는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이슬아는 스물두 살에 작가로 데뷔하며 마감의 힘으로 글을 쓰며 가녀장이 됐습니다. 오른팔에는 청소기를 왼팔에는 대걸레를 새긴 아버지 웅이와 살림노동으로 월급을 받는 어머니 복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슬아와 웅이와 복희가 바깥에서 밥을 사 먹는다면 가족 외식인지 직원 회식인지 모르지만, 모부는 슬아가 만든 출판사 직원이 됐고 슬아는 이 집안의 바깥양반이 됐습니다.

낮잠 자는 걸 좋아하고 출판이든 문학이든 낮잠을 자가면서 해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낮잠 출판사를 설립한 건 삼 년 전이었습니다. 슬아는 돈, 재미, 의미, 의무, 아름다움 중 최소한 두 가지를 충족하는 일만 수락합니다. 슬아는 노브라로 방송에 출연했다가 잘리기도 했습니다. 더우면 등목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콩나물국밥집에서 계산하며 중년의 여자 종업원에게 "선생님,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할아버지라는 가부장과 함께 살던 시절, 슬아에게 제사란 등짝과 엉덩이와 해진 양말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제사는 며느리의 노동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가녀장이 통치하는 집안에서 제사는 없습니다. 슬아는 말합니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슬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이것은 제가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라며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빠들의 시대를 지나, 권위를 쥐어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같이 바랍니다.

가녀장은 스스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며 투쟁하며 아주 조금 쟁취한 것입니다. 한여름에 겨털 휘날리며 등목하는 가녀장이 수두룩하길 앙망합니다.

가녀장의 시대/이슬아/이야기장수 20221007 316쪽 15,000원

안개

안개

동틀 무렵이지만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김승옥은 무진의 명산물이 안개라고 했다. 아름다운 문학 속 명산물이라도 현실에서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노동 현장에서는 안개가 치명적이다. 시야를 흐리게 만들어 작업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명산물이라 해도, 노동 현장에선 속히 걷혀야 한다. 건설 노동자들 발소리가 하나둘 들리면 안개는 패퇴하는 적군들처럼 물러갈 것이다.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
  • 사람들은 흔히 '지방 재생'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농산촌의 관계를 도시의 물자(돈, 사람)를 경제적 혜택을 그리 받지 못하는 농산촌에 전달한다는 식으로 연상하고 그 의미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농산촌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이 아닐뿐더러 그런 방식으로는 도시 기업과의 관계 역시 지속되기 어렵다. (48)
  • 컨설팅 회사뿐만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이나 NPO, NGO 그리고 행정기관까지, 계획이나 전략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열심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만 할 뿐 정작 위험을 떠안는 것은 언제나 지역이었다. (52)
  • 창업이란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밀려드는 고객들의 절실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지역은 동반 달리기를 원하고 있다"는 내 가설을 실증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지역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동반 달리기'를 해줄 파트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59)
  • 나는 지금까지 NPO나 컨설턴트로서 지역 일을 해왔지만 어디까지나 흑자를 만들어 그 마을을 지탱하도록 돕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역할 설정은 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장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업 주체가 된다고 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자 굳건하던 마음속 '장벽'이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123)
  •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라는 사업 전체 콘셉트는 내가 정했다. 다만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가(제공 가치), 그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고객에게 전달할 것인가(타깃) 하는 문제는 실제로 고객과 접하는 매니저나 직원과 함께 고민해갈 생각이었다. (134)
  • 마을에 점점이 있는 빈집을 호텔로 만드는 데서 나아가 빈집 이외의 자원을 호텔 기능의 일부로 활용해 인구 700명의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을 논두렁길이나 도로를 호텔 복도로 기능하게 하고 휴게소를 라운지로, 고스게 온천을 목욕탕으로, 마을 상점을 특산물 판매점으로, 그리고 마을 주민은 지배인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마을 전체가 호텔로서 존재하는 가치관을 구축하다 보면 마을의 매력을 호텔에 녹여내 지역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149)
  • 전체 마을 주민에게 알리기 전에 노년층에 먼저 설명한 효과는 매우 컸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어떻게든 좋게 만들어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열정으로 노년층이 이 사업을 주위에 널리 알리면서 마을 전체가 우리 사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58)
  • '계획'→'자금'→'인재'에서 '인재'→'자금'→'계획'으로, 말 그대로 정반대 순서로의 전환은 큰 결단이었다. 다만 이러한 결정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다양한 지역과 '동반 달리기'를 해오면서 지역 실정을 체감으로 터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0년 후를 내다보며 새로운 방향성을 그려냈지만, 이 작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브랜딩의 사다리를 하나 올라왔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새로운 사다리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불안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217)
  • 사토유메를 처음 시작했을 때 많은 지역에서 우리가 내세운 '동반 달리기'나 '고향의 꿈을 현실로'라는 이념에 공감해 실적도 없는 우리에게 지역의 미래가 걸린 일을 맡겨 주었다. 나와 더불어 일하는 직원들 역시 '사토유메답다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마을의 미래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은 고향을 미래로 이끌어가려는 '의지'이며, 성실하고 투박하게 지역과 계속 마주해 가는 '삶의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52)

700명 마을이 하나의 호텔로/시마다 슌페이嶋田俊平/김범수 역/황소자리 20230306 258쪽 18,500원

정책을 제안하고 보고서만 납품하던 컨설턴트가 직접 회사를 만들어 700여 명이 사는 마을을 되살리고 소멸 위기를 극복한 활동 보고서입니다. 계획한 정책의 성공 여부는 뒷전이었다가 몸소 지방 재생을 위한 '동반 달리기형' 회사를 만들고, 자금과 인재를 끌어모아 지속 가능한 모델을 넓히고 있습니다. 공공사업으로 시골에 시설이나 건물만 만드는 '하코모노 행정(세금을 낭비하는 전시행정)'이 되지 않는 힌트를 알려줍니다.

영화 셀렉트 한 줄 후기

영화 셀렉트

실 다루는 기술이 신에 버금가는 출장 재봉사가 선택하면 운명이 된다.

영화 〈셀렉트Sew Torn, 2024〉는 2000년 생인 감독이 21세 때 만든 동명의 단편 영화를 바탕으로 감독한 첫 장편 영화라고 합니다. 프레디 맥도날드(Freddy Macdonald)가 각본과 감독은 물론 편집까지 했습니다. 영화는 세 가지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운명을 기발하게 풀었습니다. 우연히 들린 알프스 언저리 식당에서 먹은 감자 부침이 기막히게 맛있어 소문내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차기작이 기대됩니다.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The Arbornaut: A Life Discovering the Eighth Continent in the Trees Above Us, 2021
  • 과학자들은 눈높이에서 나무줄기를 관찰하는 식으로 환자의 ‘엄지발가락’만 측정하고, 머리 위로 자라나 나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듬지는 조금도 쳐다보지 않은 채 숲 건강을 포괄적으로 추론했다. 수목 관리자가 나무를 완전히 베어낼 때 온전히 관찰할 기회가 유일하게 주어졌지만 이는 화장하고 남은 유골로 사람의 병력을 평가하는 셈이다. (12)
  • 지구 건강이 숲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숲우듬지는 산소를 생산하고, 담수를 여과하고, 햇빛을 당분으로 전환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공기를 정화하며, 무엇보다 이곳에는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 도서관이 자리한다. 전기 배전망이나 정수장과 달리 지구 건강을 지키는 이 복잡한 삼림 기계를 유지하는 과정에는 막대한 세금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는다. 다만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인간의 파괴 행위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16)
  • 유년 시절 자연에서 식물을 발견하고, 만지고, 냄새 맡고, 식별하는 등 오감을 발달시키며 만끽했던 즐거움은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대학원생이 되어 연구하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소수의 여성에게 조언하는 과정에 영감을 주었다. 어릴 적 나의 마음에 담겨 있던 그 모든 열정은 헝겊 조각을 이어 붙인 조각보처럼 한데 뒤엉켜 궁극적으로 나를 세계 최초의 나무탐험가로 성장시켰다. 자연을 탐험하면서 평온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현장 생물학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나무였다. 대부분 고독이었다. 대부분 야생화였고, 나뭇잎이었고, 자연의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는 호기심이었다. (44)
  • 최근 기후변화가 시작되고 날이 갈수록 극단적인 날씨의 진폭이 커지면서, 자연환경에서 비롯하는 계절적 온도 신호는 대자연의 체계에 큰 혼란을 주며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하루 단위로 규칙적인 빛 주기를 형성한 태양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가을 활동을 멈추고 겨울을 대비하거나 겨울 활동을 멈추고 봄 활동을 시작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식물이 계절 변화를 판별하는 기준을 햇빛이 아닌 온도에만 두었다면 특히 온난화 추세가 가속화되는 오늘날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대규모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76)
  • 21세기 초와 비교해 기후변화에 관한 논의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20세기 후반 우림 생태학자들은 삼림 건강을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벌목, 화재, 개간을 꼽았다. 벌목 트럭을 피해 다니던 1980년대에 나는 곤충의 기이한 창궐과 그와 연관된 따뜻하고 건조한 환경을 경고하지 않았는데, 생태학자들은 그런 환경 변화가 인간의 개입에 다소 영향을 받은 결과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연의 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호초 과학자와 우림 과학자는 여전히 그 복잡다단한 자연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만 초점을 맞췄고, 인간이 초래한 극단적인 이상 현상들, 특히 위협을 가속화하는 기후변화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37)
  • 인간은 주식, 부동산, 가구 등에 투자하고 때로는 요트나 와인 창고로 성공을 가늠하지만 나무는 생존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한다. (141)
  • 더보기...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The Arbornaut: A Life Discovering the Eighth Continent in the Trees Above Us, 2021/마거릿 D. 로우먼Margaret D. Lowman/김주희 역/흐름출판 20221020 460쪽 22,000원

"Canopy Meg"로 불리는 마거릿 D. 로우먼 박사는 나무 꼭대기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입니다. 나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연구할 때 로우먼은 나무에 올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연구했습니다. 로우먼이 나무에서 지구의 여덟 번째 대륙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 숲 생태를 연구한 우듬지 생태학의 창시자"입니다. 나아가 나무 수관 사이를 걷는 공중보행통로(Canopy walkways)를 개발해 생태관광을 시작한 환경보전론자입니다.

책은 로우먼 박사가 펴낸 회고록입니다. 현장 생물학자, 며느리, 주부, 엄마, 민박집 주인 그리고 우듬지 데이터를 밤에만 몰래 연구하는 과학자였던 로우먼 박사가 지적 망명을 하는 과정은 구구절절 애절합니다. 특히 성차별과 성희롱, 유리 천장은 과학계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회고록은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가 세상에 맞선 투쟁기입니다.

덧. 오탈자
220쪽 11행 뉴잉글랜드 페퍼민트 → 뉴잉글랜드페퍼민트

樂書 원조 BTS

원조 BTS
나, 이 사람 BTS(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세계여성의날
인간은 아빠가 새끼를 낳는 해마처럼 진화하지 않는 한, 여인천하 세상이 돼야지요. 그리하여 억압받던 남성이 향후 적어도 이천 년 동안 투쟁하다 겨우 세계 남성의 날이라도 얻어 육아와 살림에서 하루쯤 해방됐으면 하고 바라고요. 3월 8일 빵과 장미라는 상징은 8월 3일 술과 안주로 바뀌고요.

의료 민영화
의료 민영화를 미리 체험하고 싶은 자가 길을 묻거든 손을 들어 동물병원을 가리켜라. - 한민경, 《개만 살던 집에 고양이가 들어왔다》(든든, 2024), 224쪽

반려인과 반려생명은 아프지 마세요. 의료 민영화를 체험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의정여름
(찬양과 홍보 또는 광고) #오늘의정여름 선생은 내가 상상했던 거의 현존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잊으시라. 신을 알현하지 못한 인간들은 무조건 무시로 무작정 찬양하시라.

성범죄자
성범죄자는 전자발찌가 아니라 전자목줄을 채워야지요. 밤에도 멀리서 보이게 반짝반짝 야광 처리하고요.

과학하고 누워있네
  • 유시민 작가가 말한 ABC론은 가설인가 현실인가?
  • 나는 법칙과 이론 사이라고 생각한다.

떡밥
약밥은 밥인가 떡인가?

말이 많네
다시 언급하지만, 2020년, 오○○ 성추행 사건 때 피해자가 21대 총선이 끝난 이후에 밝혔지요. 민주당은 180석을 얻었고요. 민주당은 여성에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2022년, 0.3평 철제 감옥에서 농성한 유최안 노동자를 우원식 의원(강민정, 김주영, 양이원영 등)이 방문하고 특위를 만든다고 했지요. 저임금 구조와 위험한 작업 환경을 개선한다면서요. 민주당은 노동자에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갚으시라고요. 쌩까지 마시고 갚으라는데 참 말이 많네.

험한 책
이 책보다 더 험한 제목이 있으면 어디 봅시다.

꺼져라
트럼프 3분 후 언행보다 히말라야 정상의 날씨를 맞히는 게 훨씬 쉽지 싶다. 나대며 불타오르다 훅하고 한 방에 꺼졌으면 한다.

트럼프 근황
점점 꼬이재.


바위처럼 지는 꽃은 동백꽃이었다. 조방아가 혼수를 마련할 때 베갯잇에 수놓았던 그 동백꽃, 동백꽃이 모가지째 떨어질 때쯤이면 살구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 무렵이 바야흐로 봄이다. - 안도현,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몰개, 2025), 74쪽

변종 1찍
2찍을 차단 했더니 ㅇㅇㅈ를 추켜세우며 ㄹㅂ스쿨을 변호하는 변종 1찍이 나타났다. 말을 섞지 않으려고 차단했다. 저장한 전화번호가 점점 줄어든다. 꽁초 가득한 재떨이에서 장초를 선택하지만, 나는 가장 왼쪽을 지향한다. 아무튼, 봄이다.

몽고반점 날씨
중식집 〈몽고반점〉에서 한강 작가랑 낮술하며 《몽고반점》 북토크 하기 참 좋은 날씨다.

받들어총은 개뿔!
받들어총 대신 층층나무 심을 생각 좀 해봐 봐.

팔레스타인 실험실 - 이스라엘은 어떻게 점령 기술을 세계 곳곳에 수출하고 있는가

The Palestine Laboratory, 2023
  • 이스라엘은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장비를 편하게 사용해보고 '전장에서 시험한' 무기라고 홍보하면서 세계 최고의 무기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방위군 브랜드를 활용한 덕에 이스라엘의 보안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 대열에 합류했다. 팔레스타인 실험실Palestine Laboratory은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홍보 포인트다. (21)
  •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한 대학살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규모였다.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전체 190만 명의 인구 중 최소한 75만 명이 강제로 쫓겨나 신생 국가의 국경 밖에서 난민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나크바Nakba', 즉 재앙이라고 부른다. 7개월 동안 531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은 구타와 강간, 구금을 당했다. (47)
  • 이스라엘의 무기가 국가의 경제적 생존을 떠받치는 중추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이스라엘 정부가 공개하지 않는 탓에 정확한 수치를 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오늘날 300여 개의 다국적 기업과 6,000개의 스타트업에서 수십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판매량이 폭증해서 2021년 방위 수출이 역대 최고인 113억 달러에 달했다. 2년 만에 55퍼센트가 증가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사이버 보안 기업들 또한 매출이 급증해서 2021년에 100건의 거래로 88억 달러를 손에 넣었다. 같은 해에 이스라엘의 사이버 기업들은 이 분야 세계 자금의 4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팔레스타인 실험실에는 예나 지금이나 단점이 거의 없다.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워싱턴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종종 미국이 공개적인 지원보다는 은밀한 지지를 선호한 지역에서 활동했다. 가령 이스라엘은 냉전 시기에 미국 의회가 미국 기관들의 공식적인 활동을 봉쇄한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의 경찰을 지원했다. (52)
  • 더보기...

팔레스타인 실험실The Palestine Laboratory, 2023/앤터니 로엔스틴Antony Loewenstein/유강은 역/소소의책 20231212 356쪽 23,000원

이스라엘이 전장에서 시험을 거쳤다고 홍보하는 무기는 실상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저항을 차단·진압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거나 하마스 등이 무장 공격을 벌이면 무차별적으로 보복 공격을 하는 데 사용된 것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테러리스트 탓을 했지만 아동과 여성을 비롯한 민간인 희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외에서 사용된 이스라엘 무기와 감시·통제 장비도 그 대상은 미국-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 과테말라의 마야족, 미얀마의 무슬림 로힝야족, 미국의 흑인과 원주민, 인도의 카슈미르인과 무슬림 등이다. (304)

옮긴이의 말이 팔레스타인인을 실험 대상으로 쓰고 있는 이스라엘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이스라엘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 동의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실험한 기술로 인종 청소(종족 청소)를 거래한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기업들이 행사장 보안을 맡았다. 이스라엘 점령 기술은 '전쟁은 지옥이지만 분명 좋은 기회'라며 도·감청과 감시를 하는 스타트업으로 포장하고 홍보한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였지만 홀로코스트 산업으로 만든 종자돈으로 지금은 홀로코스트를 자행한다. 이스라엘은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 제정신이 아닌 국가가 됐다. 건전하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BDS(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불매, 투자 철회, 제재) 운동에 당연히 동참하고 지지해야 한다.

험한 책

트럼프
트럼프

블루스카이에서 험한 제목이라는 책 소개가 돌았습니다. 그 책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책꽂이 한 귀퉁이에서 찾았습니다. 1988년 김영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트럼프-아메리카의 꿈, 財界의 새 우상

오래전에 읽었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시 읽을 생각도 전혀 없고요. 아마 트럼프가 돈푼깨나 벌며 이름이 알려질 때 나온 책으로 보입니다. 그 후 한 세대가 지나 미국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고, 지금은 21세기 최악의 인간이 됐습니다. 시방 이보다 더 험한 책이 있을까요?


트럼프

책 뒤편에서 도서대출카드를 발견했습니다. 기억에 없지만 예전 직장 도서관에서 쌔볐나 봅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옛말이 떠올라 안심(?)합니다. 험한 책이지만 아주 오랜만에 본 재래식 도서대출카드는 정말 반가웠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 그전까지 나는 반려동물과 보호자의 관계를 부모자식 같은 혈연과 비슷하게 여기는 것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물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동물을 인격화하는 것이다. 이름을 가진 동물과 함께 살게 되자 인간이든 아니든 가족 공동체에 소속된 존재에게는 그 역할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동물의 역할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다.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는 점에서, 또 보호자와 평생 종속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사람이 반려동물에게 건네는 말은 자연스럽게 부모-아이의 언어가 된다. (27)
  •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씽어가 비유했듯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유색인종 애호가라 부르지 않고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여성 애호가라 부르지 않는다면,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사람을 동물 애호가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50)
  • 사람들은 이곳을 강아지 공장puppy mill이라 부른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번식장에서는 강아지를 생산한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은 기계지만 번식장에서 강아지를 찍어내는 것은 모성을 가진 엄마 개다. 생명을 다룬다고 해서 여기가 공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엄마아빠 개는 기계보다 나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65)
  • 누군가는 동물 활동가면 번식장을 없애라고 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 하지만 번식장은 없어지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유기견을 입양하지도 않아. 앞으로도 사람들은 품종견을, 새끼 강아지를 갖고 싶어할 거야. 그러면 번식장의 동물복지를 보장하는 쪽으로 가야지 무조건 없애라고만 하면 개들이 받는 고통은 어쩔 건데? (92)
  • 우리나라에서 강아지를 판매하는 일반적인 경로는 번식장경매장-판매처(애견숍, 동물병원)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1,000여개의 번식장이 있다. 동물보호단체는 훨씬 많은 3,000여곳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지만 어쨌든 신고된 번식장은 188개다. 농축산부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전체의 약 80퍼센트가, 동물보호단체의 통계를 따른다면 약 94퍼센트가 불법 번식장인 셈이다. (95)
  • 훈련사라는 사람, 동물 애호가라는 사람, 개를 입양 보내는 사람, 개를 입양하는 사람, 개를 오래 키웠다는 사람, 그런 사람들조차 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대부분은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따라 개들을 일관성 없이 막 키워요. 그러다 개가 문제 행동을 하면 자기가 잘못 키운 줄은 모르고 개 탓하면서 갖다버려요. 이게 지금 우리나라 반려동물 문화의 현주소예요. 유기견 문제를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생기는 거냐고 물으면 난감해요. 개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걸요. (116)
  • 어떤 번식업자들은 더 작은 강아지를 만들기 위해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적용해요. 엄마 개 아빠 개 교배해서 딸이 나오면 아빠랑 딸이랑 교배하고, 극 근친교배로 3대만 내려가면 사이즈가 거의 70퍼센트까지 줄어요. 이만하던 몰티즈가 요만해져요. (그녀는 양손을 50센티미터 가량 벌렸다가 30센티미터 정도로 모았다.) 이렇게 태어난 개는 열성인자가 결합되어서 온갖 유전병에 시달리게 돼요. 그럼 사이즈만 보고 귀엽다고 샀던 사람은 아픈 개 뒤치다꺼리하기 싫어서 갖다 버리겠죠? (119)
  • 입소한 유기동물이 살아서 보호소를 나갈 확률은 50퍼센트 정도다. 원 주인도 찾지 않고 새로운 입양자도 나타나지 않은 나머지 동물은 보호소에서 죽음을 맞는다. 20퍼센트는 안락사, 22.7퍼센트는 자연사다(2016년). 많은 사람들이 보호소가 안락사를 얼마나 시키는지에는 주목하지만 자연사 비율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호소에 들어간 동물의 자연사란 신체가 노쇠하여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상태를 뜻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저 '안락사가 아닌 죽음'을 의미하는 언어다. (139)
  •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식용 개농장이 있는 나라다. 단 하나밖에 없는 이 시스템을 통해 식용 개를 조직적으로 사육하고 유통한다. 다른 개식용 나라의 개들이 잡힌 순간부터 수난을 겪는다면 한국 개농장 개들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의 연속이다. 내가 만난 개농장 주인 김씨처럼 모든 개농장이 모견을 두고 교배를 시킨다. 모견은 출산 능력이 있는 동안은 죽음을 면하지만 새끼들이 도륙당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지켜보며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물론 모견도 출산 능력이 떨어지면 도살당한다. (190)
  • 어쩌면 개식용 문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동물학대나 환경오염이 아니라) 오직 이것,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이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학대당하는 소, 돼지, 닭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동물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건강 때문인 것처럼. (196)
  • '사실'이 항상 '진리'는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될 수 없다. 과거 우리나라에 남존여비사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의 여권 운동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사실을 당위로 착각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에 불과하다. 사실 자체는 도덕적 영역에 있지 않고 어떤 관습의 존속과 폐지를 결정하는 일과도 무관하다. 관습적 사고방식으로만 바라보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은 존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233)
  • '개 한마리 죽었다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에 대해서도 상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다. 상실에서 중요한 것은 동물이냐 사람이냐가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259)
  •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구해봤자 한해 8만마리 이상이 버려지는데 무슨 수로 다 살리겠어요. 그래서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싸우는 건 번식업자, 육견업자, 동물학대자 같은 개인이 아니라 바로 이 시스템, 생명을 싸구려 물건 취급해온 이 사회의 시스템이에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이십대에도, 유기동물 구조 활동을 시작한 사십대에도, 그리고 오십대가 된 지금도, 내 목표는 똑같아요. 약자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 나는 이 '더불어'라는 말이, '함께한다'는 뜻이 참 좋아. (273)
  •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인권 수준이 높고 권리와 복지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들이 동물권과 동물복지를 실현하고 있는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 인권과 동물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상관관계다. (281)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하재영/창비 20180413 316쪽 15,000원

사람이 헬조선이라고 외치는 나라에 동물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죽어가는 개(소, 돼지, 닭 등등)를 지켜보는 활동가는 "다음 생에 강아지로 다시 태어난다면 헬조선에 아닌 나라에 태어나라"고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한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성은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한 말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크게 새겨야 한다. 뭐라도 행동하면 그만큼 세상은 변한다.

미드 나이트 에이전트 시리즈 한 줄 후기

The Night Agent
나이트 에이전트1, 2
손이 많이 가는 공무원 남친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마다 남친을 살리며 대활약하는 코딩하는 여친 이야기

The Night Agent
나이트 에이전트3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영부인의 음모를 밝히려고 동분서주하는 공무원 남친이 전화 한번 없자 얼굴도 비치지 않은 코딩하는 여친 이야기

두 주에 걸쳐 미드 나이트 에이전트(The Night Agent)를 시즌3까지 연이어 봤습니다. 나이트 에이전트 시즌2를 보려다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아 시즌1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제격입니다. 시즌1, 2에서 결정적일 때 남친을 구하며 맹활약하던 여친이 시즌3에선 쏙 빠졌습니다. 무척 섭섭해서 남긴 후기입니다. 격하게 바쁜 경우에도 안전띠는 꼬박꼬박 매는 장면이 재밌는 드라마입니다. 시즌3 후반부, 폭탄 실은 트럭을 몰아 바다에 빠트릴 때도 안전띠를 꼭 매는 안전운전 홍보형 드라마입니다.

추월의 시대 - 세대론과 색깔론에 가려진 한국 사회의 성장기

추월의 시대 - 세대론과 색깔론에 가려진 한국 사회의 성장기
  •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선진국들과는 달리 자국의 엘리트 계층과 '평범한 시민인 나'의 역량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안다. 엘리트 정치가 지극히 무책임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38)
  • 한국 사회에는 엘리트 정치가 아니라 오히려 포퓰리즘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제각기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에 골몰하여 투쟁하는 한국인의 특질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되려면 무책임한 엘리트 정치에서 벗어나 책임 있는 포퓰리즘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 있는 포퓰리즘'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물을 때 우리는 '피드백 사회'라는 현상을 검토하게 된다. (39)
  • 중도파란 말을 정치 현장에 대입할 때는 ‘스윙보터’라고 쓰기도 한다. 그들이 특정한 정당의 지지층이 아니라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들이 유동하는 현상이 아니라 유동하면서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했을 때 ‘캐스팅보트’라고 쓰기도 한다. (...) 한국의 선거에서는 오랫동안 충청 지역이 그러한 ‘캐스팅보트’의 위치를 점해왔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단일화 협상을 진행 중이던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사이에서 호남 여론이 고심한 것처럼 상황에 따라 기존에는 텃밭처럼 보이던 영역도 종종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지역주의가 퇴조하면서 2030세대 청년층이 캐스팅보트로 여겨지게 됐다. 보통 60세 이상이 산업화 세대로 여겨진다면, 4050세대는 민주화 세대로 여겨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중도파, 스윙보터, 그리고 캐스팅보트 등 뭐라고 부르든 그 집단의 무게추가 청년세대로 이동하는 현상은 물론 우리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68)
  • 우리가 지금 중도파라고 표현하는 시민 그룹은, 1980년대부터 경제성장과 민주화 양쪽 모두를 적당히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경제성장도 좋은 일이고 민주화도 좋은 일이다. 현존하는 2개의 정치 세력이 각각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중한다면, 시민들은 순차적으로 한쪽에 힘을 더 실으면서 2개를 다 얻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위다. 물론 1980년대는 1987년 이후의 대통령 직선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권위주의 정부를 뒤엎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시민 그룹이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부라는 한 축을 결정적으로 뒤엎는다는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확신이 필요했다. 다른 한 축인 민주화운동 세력의 적극적인 활동이 누적되어서 그들이 함께 세상을 뒤엎을 만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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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의 시대/김시우, 백승호, 양승훈, 임경빈, 하헌기, 한윤형/메디치미디어 20201230 384쪽 17,000원

1980년대생이 바라본 한국 사회, 60세 이상인 산업화 세대를 지나 민주화 세대인 4050 직후 세대인 30대가 중도파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며 파격적으로 해석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더라고 새로운 관점이 아주 신선하다.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며 지켜본 저력으로 한국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렸지만, 지금처럼 요 모양 요 꼬라지가 될지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내년에 다시 한번 평가하는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
  • 한국을 지옥으로 지칭하는 헬조선, 삶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 저축을 포기하고 현재의 소비를 즐기는 욜로족과 같은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현실은 기성세대가 약속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현실이 젊은 세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반증한다. 과거의 방정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새로운 성공 방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식과 코인에 투자하고 사업을 시작하며 유튜버나 SNS의 인플루언서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길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에는 정신과를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에서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은 여전히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26)
  • 한국 사회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주장이 문자 그대로 적용되는 사회다. 이상하게도 모두가 같거나 비슷한 목표를 추구하니 말이다. 누구나 일명 '사'자 달린 직업(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등)이나 공무원, 대기업 직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30)
  • 나는 꿈을 꾼다는 것이 개인의 희망과 바람 그리고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꿈은 추구하는 과정 자체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꿈'은 개인을 구속하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하는 수단이다. (31)
  • 나는 결혼을 반대하지 않는다. 단지 '결혼을 위한 결혼'에 참여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56)
  • 아무래도 회사는 직원들이 책상을 오래 지키고 있을수록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정확히 그 반대다. 일을 오래 할수록, 특히 무의미한 일을 오래 할수록 우리는 피곤해지고, 자연히 실수가 잦아지며 살이 찌고, 병들어 간다. 이른바 '번아웃 증후군'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사생활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일이 곧 삶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에 길들여진다. (70)
  •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의 언론은 진실을 존중하지 않고, 기록과 자료를 '조작'하는 데다 사실무근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며, 보도 대상의 사생활을 수시로 침해한다. 또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리지 않으며 아무런 사유도 제공하지 않고 수정과 삭제를 반복한다. 게다가 그들은 앞장서서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고 차별을 부추긴다. 이는 그들이 속한 한국기자협회의 윤리 강령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들이다. (90)
  • 미디어의 역할이란, 사람들이 각자의 원칙에 따라 타당한 의견을 가지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와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예시에서 알 수 있듯, 오늘날의 한국 미디어는 그 반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독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방해하며 개인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91)
  • 일부 남성들의 극단적인 여성 혐오 문화는 일부 여성들에게서 같은 수준의 대응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할 만한 모든 극단적인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를 재생산하고 있다. 특히 성별이 편중된 커뮤니티 공간에서 이런 정보와 주장들이 활발하게 공유되며 거기에 반하는 목소리는 철저하게 통제당한다. (105)
  • 온전히 개인의 자유와 선택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때로는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받기 마련이며 어느 정도는 개인의 자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흑백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환경이라면 개인의 선택 기회는 한층 줄어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가 허용하는 '옳은 선택' 외에는 잘못된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10)
  • 한국은 난민을 '못사는 나라의 사람'이나 무슬림 정도로 생각한다. 나아가 그들을 경제적 이주민, 가짜 난민, 불법 체류자,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본다. 이런 차별적 인식은 극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선동에 의해 강화된다. 그들의 극단적 주장은 미디어를 통해 '난민 반대 시위' 혹은 '난민 반대 시민 단체'로 포장된 채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들과 관련한 다른 많은 이야기들 중에 오로지 편향되고 왜곡된 주장만이 확대 재생산된다. 자극적 언사로 점철된 미디어를 접한 대중은 마치 난민이 거대한 사회 문제인 양 오해할 수 있다. (124)
  • 상품으로 치면 우리 모두는 크든 작든 특정 부분에서는 불량품이다. 서로 비교하고 서로 투쟁하고 서로 경계해야 하는 초경쟁 사회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 모두는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늘 존재해 왔다. 가령 아파트 경비원은 아파트 주민에게 차별받고, 그 경비원을 차별하던 사람 역시 국산 경차를 몬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차별하고 차별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133)
  • 우리가 부지런히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주입된 꿈이 아니라,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수용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려는 노력이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참된 행복을 맛보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라파엘 라시드/허원민 역/민음사 20220708 164쪽 15,000원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코리안 벤토가 인연이 돼 한국살이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한국의 어두운 면을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 알려준다. 술술 읽히지만 지적은 예리하다. 반성하며 개선하지 않으면 내일은 더 불행하다.

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독고라는 사내는 동물의 음성 같은 어눌한 말씨, 엉거주춤 움직이는 병든 곰 같이 엉성한 동작,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 같던 콧수염과 턱수염으로 덥수룩한 얼굴, 큰 덩치에 위압감을 주는 눈빛, 미모보다는 연기로 승부해야 하는 인상, 빙하가 녹아 갈 곳을 잃는 북극곰 같아 의성마늘 햄과 쑥 음료를 아무리 먹어도 사람이 될 거라 믿어지지 않는 미련 곰탱이 같은 곰 같기도 하고 곰 사냥에 나선 원시인 같은 서울역 노숙자 출신입니다.

노숙자 독고가 우연한 인연으로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 ALWAYS에서 밤 열시부터 아침 여덟시까지 알바를 했습니다. 편의점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입니다.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가 편의점입니다. 이름인지 성인지 모르는 독고라는 노숙자가 임신한 고양이가 불쑥 사람의 집에 들어와 새끼를 낳듯이 느닷없이 불편한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불편한 편의점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그런대로 손님이 드나들었습니다. 제이에스라고 불리는 진상 손님도 들렸습니다. 참깨라면과 참치김밥에 참이슬을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하루를 마감하는 참참참 패키지 손님에게 술 대신 옥수수수염차를 권하기도 했습니다. 폐기 상품이지만 아직 괜찮은 도시락 같은 이도 만납니다. 원 플러스 원만 사는 이웃도 왔습니다. 꼴보기 싫은 사람에게 삼각김밥과 손편지를 건네면 좋아질 거라고도 했습니다.

불편한 편의점에 가면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지구가 인간을 함구하게 하려고 뿌린 역병 시대이지만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나무옆의자 20210420 268쪽 14,000원